[국민논단] 트럼프의 자폭, 민주주의의 회생

입력 2021. 1. 18.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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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호(경희대 교수·정치외교학과)


도널드 트럼프의 어리석은 자폭은 역설적으로 미국은 물론 각국의 민주주의가 회생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왔다. 트럼프는 법 집행 최고 책임자인 현직 대통령이다. 그런 그가 법치는 안중에 없는 듯, 50개 주와 워싱턴DC에서 공인된 선거 결과에 불복했다. 민주주의는 사전에 없는 듯, 증거도 없이 부정선거였다고 우겼다. 게다가 자신을 맹종하는 극단주의자들을 수치심 없이 선동했다. ‘트빠’ 폭도가 의회의사당에 난입해 선거 결과의 의회 승인을 방해하고 사상자가 속출해도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대통령은 물론 시정잡배도 해선 안 될 만행이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오점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폭거가 선을 넘은 덕에 오히려 긍정적인 국면 전환이 가능해졌다. 벼랑 끝 미국 민주주의를 되살리고 세계 각지의 독재자가 유사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경종을 울리는 역설적 계기가 만들어졌다.

이제 트럼프는 미국 정치 지형에 남아 있기 힘들다. 설혹 퇴임 후 탄핵이라는 유례없는 조치를 당하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정상적 미국인의 마음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백인 우월주의자, 여성 혐오주의자, 음모론자, 광신적 복음주의자, 총기 옹호론자 등 주변적 극단주의자들만 그의 진영에 남게 됐다. 물론 이들의 수가 만만치 않고 일부 지방에서는 큰 변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제각각의 과격 성향으로 온갖 불신에 사로잡힌 불평분자들이라 구심력을 오래 유지하는 데도 한계가 크다.

트럼프는 원래 약삭빠름, 차별편집증, 자아도취증이 합해진 불가해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이 무질서한 극단 세력에 체계적 비전과 응집력을 제공해줄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일단 권좌에서 내려오면 당장은 몰라도 장기적으론 이들을 이끌 힘이 없다. 더욱이 공화당 주류가 트럼프로 인해 소수당으로 전락했다는 피해 의식을 갖고 있기에 당내에서 트럼프 기반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앞으로 그는 비정상적 극단론자들의 비정상적 지도자로 잠시 관심을 구걸할 뿐일 것이다.

만약 트럼프가 자폭하지 않았다면 미국과 세계의 앞날은 더 위험해질 뻔했다. 4년 후를 노리는 트럼프와 그 휘하의 공화당은 전략적 극단주의에 계속 매몰돼 조 바이든 정권을 악마인 양 매도하며 양극적 분열과 대립을 악화시킬 뻔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바이든과 민주당도 반대쪽 극단으로 치달을 뻔했다. 가짜뉴스 논란이 판치는 가운데 미국 유권자는 두 패로 나뉘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선동당하며 격화된 내전을 겪을 뻔했다. 세계 곳곳의 불순한 정치인들은 엉뚱하게 트럼프 흉내 내기로 자국 민주주의를 대혼란에 몰아넣을 뻔했다. 미국처럼 전통과 제도가 비교적 견고한 곳에서도 정치인 한 명이 민주주의를 함정에 빠뜨렸는데, 아직 여건이 충분하지 않은 여타 국가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아찔한 일이다. 트럼프 모방꾼이 실제로 권력을 유지하는 ‘바나나 공화국’ 사례가 늘어날 뻔했다.

이번 일은 소중한 교훈을 준다. 민주주의는 깨지기 쉽다. 공고화됐다고 방심해선 곤란하다. 민주주의 모범 국가로 자타가 인정하던 미국도 민주주의의 큰 위기를 겪었고 아직 올가미에서 다 벗어난 것도 아니다. 순식간에 민주주의가 우중(愚衆)주의로 변질될 수 있고 소수의 독재자에 휘둘리는 권위주의로 되돌아갈 수 있다. 그동안 식자층은 민주주의에 대해 안이했다. 민주주의가 일단 확립되면 걱정 끝인 듯이 ‘역사의 종언’을 말했고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를 어떻게 조화시켜 더 멋진 민주주의로 전진할지에 논의를 집중했다. 반면 민주주의가 권위주의로 회귀할 가능성은 등한시했다. 권위주의는 민주주의에 달한 적 없는 후진국만의 문제로 착각하고 있었다. 트럼프 사태는 이런 안이함에서 깨어나도록 경각심을 일깨워주었다.

우리의 맥락에서 교훈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정치 양극화, 패거리 집단주의, 극렬한 맹종세력, 정권의 전략적 극단주의, 독불장군 국정 운영 등은 근래 미국뿐 아니라 한국의 특징이기도 하다. 제2의 트럼프가 나오기 쉬운 상황이다. 트럼프의 만행은 전화위복의 자폭으로 흘러갔지만, 민주주의가 일천한 우리로서는 만약 비슷한 일이 터질 때 체제가 못 버티고 파국의 길로 갈까 걱정스럽다. 이것이 기우에 불과하려면 정치권이 반성해야 하고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잘해야 한다. 안하무인 대통령 한 명이 얼마나 큰 폐해를 끼칠 수 있는지 트럼프 사태는 명확히 보여주었다.

임성호(경희대 교수·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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