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어느 날 갑자기

입력 2021. 1. 18.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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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세정 국제부 기자


이 모든 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다. 동물들은 서서히 멸종되고 기상이변은 해마다 그 심각성을 더해갔다. 과학자들의 경고는 수십년간 계속돼 왔고, 기후변화로 인해 인류가 맞닥뜨릴 재앙을 보여준 영화도 꾸준히 만들어졌다. 인간은 그 모든 것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폭우와 기나긴 장마, 이상 고온, 멈추지 않는 산불, 기습 한파와 폭설. 지구가 보내는 경고가 전 세계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돈다. 발달된 기술이란 무기를 가지고 있어도 자연 앞에서 인간은 무력화된다. 이것 역시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경험해 알고 있던 사실이다.

연초부터 밀라노에서, 마드리드에서, 서울에서 갑자기 퍼부은 눈으로 도시가 마비됐다. 공항과 철도가 폐쇄되고, 사람들이 밤새 눈 쌓인 도로에 갇혔다. 아열대 기후인 대만에선 기온이 섭씨 10도 밑으로 떨어지자 이틀간 120여명이 추위에 목숨을 잃었다. 지난여름을 떠올려보면 극지방인 시베리아의 수은주가 38도까지 치솟았다. 미국에선 12개 주에서 100여 건의 대형 산불이 발생해 우리나라 면적의 20%에 해당하는 2만㎢가 불탔다. 중국에선 한 달이 넘게 폭우가 쏟아졌다. 우리나라에서도 54일간의 장마가 이어졌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지난해 연평균 기온이 1951∼1980년 평균 기온보다 1.02도 높았다고 지난 14일 발표했다. 세계기상기구(WMO)는 지난해 지구 평균 기온이 14.9도로 산업혁명 이전보다 1.2도 상승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북반구의 연간 눈 높이는 관측 사상 네 번째로 낮았다.

지구 온도가 2도 이상 상승하면 전 세계 생물종의 최대 30%가 멸종 위기에 놓이게 된다. 지구 평균 기온이 1도 오를 때마다 감염병의 매개가 되는 모기는 27% 늘어난다. 해수면이 높아지면 인간이 살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진다. 미국의 언론인 데이비드 월러스는 저서 ‘2050 거주불능 지구’를 통해 인류가 현재의 산업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30년 후 지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행성이 될 거라고 말한다.

영화에서조차 한가한 시간 설정을 하지 않았다. 2014년 개봉한 영화 ‘인터스텔라’의 초반부에는 인간이 더이상 살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진 지구의 풍경이 나온다. 영화의 배경은 2067년이다. 지구가 종말을 맞이하고 인류가 다른 행성으로 떠난 상황을 보여준 영화 ‘미드나이트 스카이’의 배경은 2045년이다. 영화 ‘투모로우’는 개봉 당시(2004년) 지구온난화로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고 해류의 흐름이 바뀌면서 지구 전체가 빙하로 뒤덮이는 ‘실제 상황’을 그렸다.

유엔 환경개발회의(UNCED)에서 기후변화협약을 체결한 게 1992년이다.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185개국이 온실가스 감축에 대해 합의했다. 30년이 돼 가는 일이지만 각국의 탄소중립 움직임은 최근에 이르러서야 가시화되고 있다. 각국의 기후변화 대응 성적을 지표로 나타낸 ‘기후변화대응지수(CCPI) 2020’ 보고서에서 한국은 61개국 가운데 58위를 차지했다.

스웨덴 기후 운동가 그레타 툰베리(18)가 시작한 ‘청소년 기후행동’이 국내에서도 활동 중이다. 청소년 기후행동은 지난해 한국 정부의 안일한 기후 위기 대응이 생명권 등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 심판 청구서를 제출했다. 다음 세대를 위해 기후변화를 막아야 한다고들 말해왔다. 하지만 당장 오늘의 일기예보만 봐도 이미 내 앞에 닥친 일이다. “입으로만 말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 달라”는 툰베리의 말이 정치인이나 기업인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개개인이 가진 위기의식이 행동으로 이어질 때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그 어느 때보다 체감하고 있는 요즘이다. 폭염도, 한파와 폭설도 인간 활동이 유발한 지구온난화 때문이라는 걸 모른 척하기엔 너무 늦었다. 당장 어떤 재난영화가 눈앞에 펼쳐지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일은 아니다.

임세정 국제부 기자 fish81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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