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혁신의 시작, 손을 쫙 펴는 것
유명 스타트업 창업자와 카카오톡의 성공 비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사용 편의성, ‘라이언’으로 대변되는 친근함. 그리고 무료라는 점. 카카오톡의 장점은 여러 가지다. 유명 창업자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카카오톡 성공의 1등 공신으로 ‘SKT와 KT, LG유플러스’ 같은 이동통신사를 꼽았다.
카카오톡이 시장에 뿌리를 내리던 2010년 전후, 이통사들의 유료 단문 메시지(이하 SMS) 매출은 연 1조5000억원 대에 달했다. SKT는 SMS로 분기마다 2500억원을 벌었다. 하지만 당시는 카카오톡뿐 아니라 수십 개의 무료 메신저 서비스가 쏟아져 나올 때였다. 아이폰에도 무료 모바일 메신저(아이 메시지)가 기본으로 깔렸다. 카카오톡이 아니었어도 어차피 SMS 매출은 사라질 게 분명했다. 이동통신사들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SMS 무료화’라는 필승 카드를 적기에 내놓지 못한 이유다. 결국 카카오톡 등에 시장도, 매출도 모두 뺏겼다. 참고로 2000년대 후반 무료 메신저 업계 1위는 SK 계열의 ‘네이트 온’이었다.
새삼 옛날 얘기를 꺼낸 건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어서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최근 사장단 회의에서 “업계에서 가장 먼저 시작했음에도 부진한 사업군이 있는 이유는 전략이 아닌 실행의 문제”라며 “투자가 결실을 보기 위해서는 전략에 맞는 실행이 필수”라고 쓴소리를 했다 한다. 맞는 얘기다. 한때 ‘유통 제국’으로 불리던 롯데는 최근 쿠팡 등 새로운 유통 강자들과 힘겨운 사투를 벌이는 중이다. 수요 부진에 떨고 있는 정유업계나 몇 년 전까지 ‘보이지도 않던’ 테슬라와 싸워야 하는 현대차도 괴롭긴 마찬가지다.
계획이 없어서 그렇게 된 걸까. 국내 최초 인터넷쇼핑몰인 ‘롯데인터넷백화점’이 처음 선보인 건 1996년 6월이다. 세상이 바뀔 거란 건 그때 이미 알았다. 기존 대기업들이 소위 ‘혁신기업’과의 싸움에서 버거운 상황에 놓인 건 그간 손에 꼭 쥐고 있던 ‘매출과 이익’을 제때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계획은 있지만, 실행은 없었던 이유다. 물론 기존 매출을 포기하는 건 고통스럽다. 하지만 내가 바뀌지 않으면 어차피 남에게 빼앗길 매출이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역시 아이팟 판매 잠식 우려에도 불구하고, 아이폰을 내놓지 않았나.
기업마다 혁신을 외친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도입하고, 외부 인재를 영입한다. 근데, 그건 미시적인 방법론일 뿐이다. 손을 쫙 펴자. 새로운 걸 잡으려면 쥐고 있는 걸 놓아야 한다. 그게 혁신의 시작이다.
이수기 산업 1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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