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유통기한
[김종성 기자]
▲ 윤석열 검찰총장이 지난 2019년 9월 25일 오전 인천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열린 마약류퇴치국제협력회의에 참석한 모습. |
ⓒ 이희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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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기간을 최근 30일간으로 압축해도 마찬가지다. 관심도가 가장 높았던 날은 12월 24일이며 그 후로 현저히 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간 윤석열 총장에 대한 관심도를 제고시킨 최대 요인은 검찰개혁 이슈다. 그는 검찰개혁을 추동하는 물결이 아닌, 그에 대항하는 물결에 올라탔고 이는 그가 국민의힘과 극우세력의 응원을 받는 원동력이 됐다.
그랬던 그에 대한 관심이 식고 있는 것은 추 장관의 사의 표명과 김진욱 공수처장후보 지명(12월 30일)으로 검찰개혁이 일단락되는 모양새가 나타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국민의힘과 극우세력이 그를 열렬히 응원할 동기가 약해지고 있는 것이다.
▲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지난해 12월 29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2021년 신년특별사면’을 발표한 뒤 청사를 나가기 위해 승강기를 기다리고 있다. 법무부는 2021년 새해를 맞아 중소기업인·소상공인 등 서민생계형 형사범, 특별배려(불우) 수형자, 사회적 갈등 사범 등 총 3,024명의 특별사면을 오는 31일자로 단행한다고 밝혔다. |
ⓒ 사진공동취재단 |
자신을 박대한 박근혜 정권은 물론이고 자신을 중용한 문재인 정권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대항한 데서 느낄 수 있듯이, 윤석열 총장은 자기주관이 매우 강한 인물이다. 박 정권 때인 2013년 10월 21일 국정감사장에서 했던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발언은 그의 성격적 특성도 어느 정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성향의 소유자가 퇴임 후 보수정당과 원만한 조화를 이루자면, 양측 모두의 상당한 노력과 인내가 요구된다. 이는 검찰개혁이 일단락된 상황에서 그가 외부 세력의 지원을 받아 예전의 관심도를 회복하는 일이 녹록지 않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 그가 직업 정치인이었고 그의 핵심 기반이 정치 조직이었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관심도가 떨어지는 지금 상황을 돌파하고 반전을 꾀하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 중립을 준수해야 하는 검찰총장이고, 그의 핵심 기반인 검찰 내 일부 그룹도 정치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기 힘든 처지에 놓여 있다. 그래서 외부 세력의 후원이 없을 경우에는 그에 대한 관심도를 도로 높여줄 원동력이 그의 주변에서 발생하기가 쉽지 않다.
거기다가 윤석열 자신이 정치투쟁에 최적화돼 있지 않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그가 법무부장관의 직무배제 명령과 대통령의 징계 재가에 맞서 내놓은 대응 수단들이 한결같이 법률적인 것들이었던 데서도 나타난다.
일례로, 11월 24일에 법무부장관이 직무배제명령을 내리자 그는 25일에는 집행정지 가처분을 신청하고 26일에는 취소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직무배제명령을 일단 정지시키는 한편, 그 명령을 아예 취소시키는 별도의 소송을 건 것이다.
소송을 좋아하는 사람처럼 비칠 정도로 법률적 대응에 올인하는 것은 총장직을 지키는 데는 바람직할지 몰라도, 그가 문재인 정권의 검찰개혁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이 법률적 수단 외에는 딱히 없음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가 구사하는 이 같은 방식은 정치투쟁을 관찰하는 대중의 눈에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관전자들의 몰입도를 높이는 데는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퇴임 뒤에 외부 세력과의 화학적 결합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 자신도 정치에 최적화돼 있지 않고 그의 핵심 기반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검찰개혁이 마무리되는 지금 시점에서 그에 대한 관심도가 예전처럼 올라가기는 쉽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지금 상황에서는 '검찰개혁 저지용(用)' 인물이 극우·보수 세력에게 긴요하지 않으리라는 판단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업계 선배' 이회창·홍준표의 경우
그의 입장에서 볼 때 다행스러운 것은, 관심도가 떨어지기 전에 그가 대선후보 여론조사에서 유력 후보군에 들게 됐다는 점이다. 이는 그에 대한 관심도가 당장에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지 않도록 해주는 안전장치 역할을 해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대선후보군에 들어간 원동력은 검찰개혁 이슈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슈가 약해진 상황에서 유력 후보군에 계속 남아 있으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노력과 더불어 훨씬 많은 행운이 계속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윤석열처럼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인물에게 이슈의 동향이 얼마나 긴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 많다. 그의 '업계 선배'들인 이회창과 홍준표가 여느 법조인 출신들보다 훨씬 더 많은 정치적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이 1987년 직선제 개헌투쟁 이후의 법치주의 흐름을 타고 정계에 데뷔했기 때문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장 겸직 시절에 선거법 위반 사안을 여야 가리지 않고 법대로 처리한 이회창 대법관과, 조폭 및 특권층을 마구 구속시킨 홍준표 검사의 등장은 인치(人治)를 극복하고 법치를 정착시키려는 당시의 시대정신에 부합했다. 결국 보수정치의 길로 들어서기는 했지만, 이들은 법치주의라는 대세에 힘입어 유력 정치인이 될 수 있었다.
이슈의 변화는 정치 초년생 시절의 이회창·홍준표뿐 아니라 오랜 경험을 가진 노련한 정치인의 운명에도 당연히 영향을 끼친다. 신탁통치 반대운동의 열기가 전국을 뒤엎었던 1946년 상반기의 여운형도 그런 일을 겪었다.
'조직을 통합해 반탁운동을 함께하자'는 자신의 1946년 1월 1일자 제의가 백범 김구에 의해 바로 그날 거절되자 찬탁으로 돌아선 여운형은 이 때문에 정치적으로 위축될 뻔했지만, 미군정이 띄우는 좌우합작 이슈 덕분에 그해 상반기에 정국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됐다.
미군정은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에 따라 한국임시정부를 세우고 신탁통치를 실시하자면, 반탁운동을 가라앉히고 좌우파의 화해가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좌우합작 이슈를 만들어냈다. 그 이슈가 위력을 발휘하는 동안, 중도파 여운형은 최대의 주목을 받았다. 1946년에 61세였던 그는 이미 노련한 정치가였지만, 그런 그도 이슈의 동향에 따라 정치적 명운이 엇갈릴 수밖에 없었다.
시대 조류를 좌우할 만한 이슈가 떠오르면, 그에 대항하는 기운이 함께 형성되곤 한다. 촛불집회가 열리자 맞불집회가 열리고 검찰개혁이 추진되자 반대 운동이 일어나는 것 등이 그런 일들이다.
이런 경우, 어느 쪽에 편승하든 세상의 주목은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 맞불집회나 검찰개혁 반대운동에 가담하는 사람들도 관심의 대상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쪽에 편승할 경우에는 그것이 단기간에 그칠 공산이 농후하다.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목소리는 얼마 안 있어 잠잠해지기 마련이고 그런 목소리를 냈던 사람들도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기 쉽기 때문이다.
▲ 윤석열 검찰총장이 지난해 10월 22일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마스크를 만지고 있다. |
ⓒ 공동취재사진 |
'대통령 직선제냐 아니냐'로 온 나라가 들썩거렸던 1986년에 신한민주당(신민당) 총재를 지낸 이민우도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 국민과 재야와 신민당이 직선제 개헌을 부르짖고 전두환 정권이 힘으로 그에 맞서는 상황에서, 신민당 총재 이민우는 1986년 12월 24일 전두환 정권의 내각제 개헌 움직임에 동조하는 '이민우 구상'을 발표했다.
이민우의 선택은 직선제를 반대하는 보수 기득권층의 요구에 부합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전두환 정권이 그럭저럭 건재했기 때문에, 보수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선택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시대흐름을 거스르는 것이었고, 결국 그는 6월항쟁 얼마 뒤에 정계를 은퇴하게 됐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이 해산된 1987년 11월 6일 이민우는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윤석열은 애초에는 시대 흐름에 순행하는 쪽에 있었다. 촛불혁명이 진행될 때인 2016년 12월 1일 박영수 특별검사의 수사팀장으로 발탁되면서 국민적 주목을 받은 것은 그가 적폐세력인 박근혜 정권의 반대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스컬레이터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뛰어넘는 사람마냥, 그는 2019년에 검찰총장이 될 즈음부터 흐름을 갈아탔다. 검찰의 위신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시대흐름에 명백히 역행하는 것이었다.
만약 처음의 흐름을 그대로 타고 갔다면, 그의 '퇴임 후 대국민 봉사'는 훨씬 더 많은 축복과 지지를 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대에 역행하는 흐름을 탔기 때문에, 그는 '검찰개혁을 저지하면서도 임기를 끝끝내 다 채운 검찰총장'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극우세력과 국민의힘이 그를 띄워준 것은 그의 존재가 검찰개혁을 저지하는 데 유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용도는 이미 상당부분 폐기됐다. 그래서 '퇴임 후 대국민 봉사'의 꿈을 이루고자 한다면, 그는 이제까지 해왔던 것보다 훨씬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함은 물론이고 새로운 인적 기반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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