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료 없어서 중학교 중퇴.." 역경을 딛고 서산시의회 부의장이 되기까지

최미향 2021. 1. 17.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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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수의 서산시의회 부의장

[최미향 기자]

▲ 서산시의회 이수의 부의장 인생역경 스토리
ⓒ 최미향
 
처음 이수의 서산시의회 부의장을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만난 자리였다. 그는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까 망설여진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진 말, "어려서부터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그러다 보니 그 누구에게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다.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최소한의 자존심이었으니까.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이 없어도 결코 배고프다며 덤벼들어 밥을 먹지못했다"라고 회고했다.

밥을 굶었던 시간 속에는 늘 '물'이 곡기를 대신해 배를 채워줬다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 어린시절을 회고하면 참 가슴 아프실 것 같다. 그래도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달라.

"이미 지난 얘기지만 새삼 엄마를 생각하니 어린 자식을 두고 떠난 그 심정이 어땠을까 가슴이 아프다. 남겨진 우리는 늘 배고파서 힘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 하루종일 굶었어도 누군가 '밥 먹었느냐?'고 물으면 '먹었다'고 대답할 정도였다. 이 말은 내 속에 갇힌 눈물을 막는 최소한의 방어막이었으니까.

4살, 기억에도 없는 엄마의 빈자리를 그나마도 누님과 형수님이 대신해주며 국민학교를 다녔고, 그러다 늦깎이 중학교 시절, 도저히 형편이 감당되지 않아 친구들을 교실에 남겨두고 돌아서야만 했다.

나는 중학교 중퇴 출신 서산시의회 부의장이다. 덤프트럭을 운전했고, 그러던 중 대형 사고로 나는 골절상, 형님은 뇌 손상으로 장애인이 됐다.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았던 보기 드문 이력의 기초의원, 나는 지금도 '사람 위에 사람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신조로 당당히 맡은 바 임무를 다하고 있다."

- 성장 과정은?

"내 나이 겨우 네 살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셨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엄마만 자꾸 찾았다고 했다. 엄마의 부재를 알게 된 것은 그러고도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난 후였다. 감사하게도 형수님이 그 자리를 대신해주었다.

큰형님 내외분께 의지하며 겨우 국민학교를 마쳤다. 중학교는 결국 입학금을 내지 못해 이듬해 어렵게 입학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갑자기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나 땅에서 솟나 어쩔 수 없이 수업료를 내지 못하고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중퇴를 해야만 했다.

돈을 벌기 위해 부천 작은댁으로 올라가 철공소 기술을 배웠다. 사촌들이 가방을 들고 학교 가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내성적인 성격에 곁눈질로 훔쳐보며 부러운 내색을 숨겼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입대 통지서를 받고 '31화학 실험소'에서 운 좋게 보일러 방위병으로 생활하던 중 큰형님의 부름을 받고 내 고향 서산으로 내려와 그때부터 밤에 근무하고 낮에는 덤프트럭 일을 하면서 일등병 만기 제대를 했다."

- 자라면서 유난히 기억에 남는 일들은?

"7남매 중 막내로 서산시 음암면 문양리에서 태어나 4살 때 엄마를 여의고 해미면 산수리 안흥정 산중으로 이사를 했다. 엄마 사진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너무 어려서 얼굴이 기억 나지 않아 한동안 뒤적뒤적 엄마 흔적을 찾기 위해 집안을 헤집어 놓았다. 이런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장애로 걷지 못하는 셋째 누님이 엄마처럼 나를 보듬어 주었고, 누님 혼자서 배운 한글을 들고 동생인 내게 가르쳐 주며 안타까운 시선으로 챙겨 주었다.

어느날 참 똑똑한 누님에게 '누난 어떻게 글을 배웠어?'라고 묻자 '내 친구 영숙이가 스승이야. 그 애가 학교 갔다 올 때면 기다렸다가 '오늘 배운 것 좀 가르쳐줘봐'라고 해서 아버지, 어머니부터 막대기로 땅에 쓰며 배워 나갔지'라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국민학교 5학년이 되는 해, 셋째 누님이 누군가의 중매로 장애를 앓고 있는 남자를 만나 시집을 갔다. 한동안 '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떠날까!' 생각하며 누나가 나가던 사립문 밖에 서서 누나의 뒷모습을 쫓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장애를 앓고 있는 분들을 보면 마음이 쓰여서 쉬 바라볼 수가 없다. 모두가 내 누님 같고 모두가 우리 매형 같기 때문이다. 누구는 '그 나이면 떼를 쓸 만도 했을 텐데 어릴 적에도 애 어른 같았다'고 나를 회상하더라. 이 말조차도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우리 작은형님은 나와는 좀 다른 것 같다. 호적이 잘못되어 초등학교 4학년 때 신체검사통지서가 나왔다. 그때 형님은 그 어린 나이에 군대에 가겠다고 떼를 쓰며 고집을 부렸단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 학창시절 지금도 기억나는 사건이 있다면?

"추억은 없다. 다만 교무실에서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땅만 바라보다 집으로 돌아왔던 게 내 기억의 전부다. 중학교 교문을 들어서기가 무서웠다. 그날도 전날처럼 나는 등교와 동시에 조회 시간에 교무실에 불려가야만 했으니까. '공납금 언제 낼 거야?' 권위적인 선생님의 목소리가 내 고막을 찢었고,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없이 바닥만 바라보았다. '돌아가'라는 선생님의 단호한 음성이 들리면 풀이 죽은 모습으로 교실로 돌아와 공부했다. 그것이 일상이었으니까. 그때를 떠올리면 마음 한쪽이 그냥 아프다."

- 부친의 교육관과 본인의 교육관은?

"우리 아버지는 불행하게도 아내를 잃고 정 붙일 곳 없어 장사하신다며 방랑 생활을 하셨기에 그다지 가정을 돌보지 않으셨다. 그러니 교육관이 있을 리 없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딱 두 가지가 전부다. 초등학교 시절, 과자가 너무 먹고 싶어 "아버지 1원만" 하면 "1원? 사리 일전도 없다"라며 단호히 잘라버리셨던 기억과 중학교를 중퇴한 나를 찾아 담임선생님이 아버지를 만나러 오셨을 때 술만 연거푸 드시며 눈물만 흘리셨던 모습이다. 그렇지만 아버지를 원망하진 않는다. 오랜 기간 비록 중풍으로 힘들어하셨지만 내 나이 24살 때까지 그저 곁에 계셔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다.

내 교육관은 다른 거 없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강조했다. 즉 마음먹기에 따라 말과 행동이 따라간다는 말인데, 그래서인지 우리 1남 1녀 두 아이는 힘들더라도 절대 좌절하지 않고 자기 일을 잘 헤쳐나갔다. 참으로 든든하다. 아빠가 곁에 없어도 잘 살아갈 것을 믿는다."

- 시의원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정치하는 친구를 도와주면서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평소 장애인과 나이 듦, 그리고 환경과 경제 등에 관심을 가졌지만, 차마 학력이 없어 도전은 꿈도 꾸지 않았다. 무엇보다 기초의원이 아니라도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무궁무진했으니까.

그러던 차, 지인이 나를 찾아와 "시의원에 도전해보라"고 권유하며 "야간이나 통신으로 등록 수료하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한사코 "시의원 하려고 학력을 만드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하며 현실에 최선을 다하고 살았다. 어찌어찌하다 우연한 기회에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보이며 제8대 서산시 시의원이 됐다."

-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현안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럼에도 우선 몇 가지만 말씀드리고 싶다.

첫째, 현대오일뱅크와 화곡1리 주민 간의 원만한 대화와 대산공단의 대기환경이다. 먼저 현대오일뱅크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윤리경영을 하여야 한다. 화곡1리 주민들은 현재 폐암 사망자가 많이 발생하고 특히 농작물 피해보상이 이뤄지지 않아 4개월간 집회를 진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루속히 원만히 합의될 수 있도록 대산공단 환경안전대책 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 참고로 대산공단 기업들은 일반산업단지란 이유로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최선의 해답을 찾고자 고민 중이다.

둘째, 기후환경과 생태계 문제다. 가뭄과 폭우가 반복되면서 생태계가 죽어가고 간월호가 오염되고 있다. 지난번 시정 질문을 통하여 간월호의 물 순환, 수질개선, 생태계복원 가뭄해결, 홍수조절, 간월호 등에 관한 정책을 제안한 바 있다

셋째, 여행객들이 체류할 수 있는 관광지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대산에서 이원으로 이어지는 대교가 건설되고, 안면도에서 원산도와 보령으로 이어지는 해저터널이 건설된다. 그렇게 되면 서산시로 유입되던 관광객의 동선이 바뀔 것으로 예상하는바, 각종 레저시설을 유치하여 체류할 수 있는 관광지로 관광객유출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넷째, 농업도 스마트팜시대다. 이제는 도심빌딩에서도 농사를 짓는 것이 현실이 됐다. 농촌인력은 외국인과 불법체류자가 아니면 농업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농업을 살리는 정책이 절실하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부의장으로서 부족하지만 초심을 잃지 않고 오로지 시민을 위해 정직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주민들의 말씀을 대변하겠다.

날이 추워졌다. 어렵게 살아온 만큼 힘없고 아픈 분들이 더 신경 쓰인다. 그분들을 위해 따뜻한 마음 쓰도록 노력하며 보살피겠다. 코로나19로 힘든 만큼 늘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를 위하는 새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시민 여러분의 가정에 건강과 행운이 함께하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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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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