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 간도 왕청현 만세시위 주도

김삼웅 입력 2021. 1. 17.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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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회] 일경의 보고서에 "수괴자는 귀화 조선인 최명록 및 최모"는 최진동과 최운산을 말한다

[김삼웅 기자]

 
▲ 광화문 사거리 칭경비각 부근에서 기미년에 만세시위를 벌이고 있는 서울 시민들. 일본의 독도 침략 행위 규탄 시위는 대한문 앞 시청광장, 종로 3가 3·1공원 등 항일 운동이 일어난 곳에서 벌임이 옳다. 광화문 사거리 칭경비각 부근에서 기미년에 만세시위를 벌이고 있는 서울 시민들. 일본의 독도 침략 행위 규탄 시위는 대한문 앞 시청광장, 종로 3가 3·1공원 등 항일 운동이 일어난 곳에서 벌임이 옳다.
 
최운산이 봉오동에서 무장독립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즈음 국내에서는 기미년 3ㆍ1혁명이 발발하여 자주민임과 독립국임을 선언하였다. 

만세시위는 3월 2일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서울의 여러 지역을 비롯해 조선 8도 전 지역에서 조직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시위가 이어졌다. 민족대표들은 비폭력ㆍ일원화ㆍ대중화의 3대 원칙을 제시했고, 시위 군중은 이에 따랐다.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3개월 동안 전개된 시위 상황을 수치로 살펴보면, 집회 총인원 202만 3,098명, 사망자 7,509명, 불탄 학교 2동, 불탄 민가 715호 등이다. 일제는 이보다 훨씬 축소해 통계를 조작했다.(박은식, 『한국통사』)

3ㆍ1독립시위는 한인이 모여 사는 해외 곳곳에서도 전개되었다. 서간도와 북간도를 비롯해 남북만주 일대와 중국 관내 여러 지역, 러시아 연해주, 미주ㆍ하와이, 일본 등지에 살던 교포들도 시위에 참여했다.
 
 최운산·최진동 형제
ⓒ 최성주
 
특히 북간도의 중심지인 룽징(龍井)에서는 3월 13일 1만여 명의 한인이 일본 영사관 옆에서 조선독립축하회를 개최했다. 행사를 마친 동포들은 시위에 나섰다가 일제 군경의 무자비한 총격으로 17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중경상을 당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북간도의 독립만세 시위에는 재만 한인과 독립운동가들이 총동원되다시피하였다. 특히 왕청현 백초구의 3ㆍ26 만세시위와 5ㆍ18 양수천자 시위는 최진동ㆍ최운산 형제들이 주도한 것으로 일제 경찰의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간도 백초구에서는 예전부터 3월 26일 오전 11시를 기하여 독립선언 시위운동을 개시하려는 것을 공공연히 말하였다. 드디어 당일 대경자ㆍ목단강ㆍ하마탕ㆍ대왕청ㆍ나자구(백초구에서 26리) 등에서 집합한 자가 약 1천 5백명(이 중 사립학교 및 서당의 조선인 학생 약 2백명 및 중국인 약 1백명)은 백초구 왕청현서(경찰서)에서 북방 약 10정(일본영사분관에서 10정)의 산록에서 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수괴자는 귀화 조선인 최명록 및 최모 등으로 이 집회에 중국인들이 100여 명이 참석하고 구 한국기와 중국기를 나란히 게양했다. 각자는 작은 깃발을 손에 들고 만세를 높이 불렀으며, 식장에는 단군교, 시천교, 예수교의 목사 등이 차례로 일어나 연설을 하였다.(이 중 부인 연설자도 있었다고 함) 해당 지역에서는 중국군 병사 및 순경의 엄중 경계에 의해서 군중은 마침내 부근에 접근하는 능력 없고 해산하거나 하였다.

해당 집합지점은 조선인 가옥 약 30호가 있는 부락으로서 이 지점에 2명의 통학 중이던 생도가 있었지만 학교에서는 전날 집회참가의 불허 지시 등 주변 사정에 대한 주의단속을 실시하여 다행히 학교 생도 중 당일 집회에 참가하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학교 학무위원 김윤협은 공공연히 위 집회에 참가하였고 현도윤ㆍ구무경ㆍ박창극 3인은 그 전 언젠가 도망함으로써 아마 당일은 참가하지 못하였고 이문백은 본 사건에 미리 관여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선언서를 우리 분관에 밀송하여 내정의 원조를 하였다고 한다. (주석 1)

일경의 보고서에 "수괴자는 귀화 조선인 최명록 및 최모"는 최진동과 최운산을 말한다.

"최운산 형제들은 1919년 3월 26일로 날을 정해 길림성 왕청현의 행정중심지 백초구에서 만세 시위를 하기로 결정했다. 백초구는 일본영사관 분관과 일제 경찰서를 비롯해 상가들이 많았던 상업중심 지역이었다." (주석 2)

만주에서 독립운동 단체가 속속 구성되고, 항일의 열기가 뜨거워지자 일제는 한ㆍ만, 한ㆍ러 국경을 더욱 강하게 봉쇄했다. 애국청년들의 월경을 원천적으로 차단시키려는 조처였다.

독립군의 활동이 3ㆍ1독립운동 이후 격심해지자 조선총독부는 국경수비를 강화하였다. 제등(齊藤) 총독은 국경경비를 강화하여 헌병으로 국경감시를 맡도록 하였다. 조선내에 있는 7개 헌병대 본부 가운데 의주ㆍ나남ㆍ경성 3개 헌병대를 국경에 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한ㆍ만 국경에는 53개소의 국경감시소가 있었고 감시소에는 헌병 상등병이 장으로 보해져 있었다. 또한 수비대가 있었고 압록강에 4척, 두만강에 1척의 경비정을 배치, 순찰토록 하였다. (주석 3)

주석
1> 「1919년 소요사건에 관한 도(道)장관 보고철」, 제4권, 조선총독부.
2> 최성주, 앞의 책, 48쪽.
3> 조선총독부 경무국, 제73회 「제국의회설명자료」, 소화 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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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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