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의 '두 집 살림', 그렇게 키워낸 아이가 수백명

민병래 입력 2021. 1. 16. 20:33 수정 2021. 1. 16.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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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에서 아동공동생활가정 '요셉의집' 꾸려가는 안정선

[글쓴이: 민병래(작가)]

1993년 이른 봄 날 안정선은 소박하고 작은 결혼식을 올렸다. 장소는 강원도 영월 '요셉의 집', 그가 부모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키우는 곳이다. 신부 또한 서울 성북구 정릉에서 '은총의 집'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돌보는 김은미였다.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이래야 열명 남짓, 혼인미사를 집전한 사제, 신랑과 신부, 김은미와 함께 일하는 천주교 자매들이었다. 사제는 수원교구 소속인데, 신랑을 친구로 둔 죄로 이날은 사목구역을 침범(?)해서 내려왔다. 그는 안정선의 은밀한 요구로 "사랑해요"라는 말을 매일 나누라고 축사를 했다.

초저녁에 시작한 미사가 끝났을 때 영월의 산속 마을에는 깊은 어둠이 내렸다. 창 틈으로 조각 달빛이 들어와 신부가 쓴 조팝나무 화관에 맑은 빛을 수놓았다. 마을을 에돌아 흘러가는 계곡물은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들을 불러모아 웅숭깊은 축가를 불렀다. 저녁 상은 영월 동강에서 건져 올린 다슬기로 국을 끓이고 산나물과 감자전을 곁들여 풍성했다.

안정선은 사제인 친구와, 김은미는 자매들과 함께 자느라 두 사람은 첫날 밤을 함께 보내지 못했다. 다음 날인가 김은미는 은총의 집 아이들이 눈에 밟힌다고 새벽이슬에 옷깃을 적시며 떠나갔다.

영등포 쪽방촌에서 만난 아이들

안정선은 결혼식을 치르기 전부터 지금까지 35년 동안 가정에서 보호받지 못한 아이들과  살아왔다. 그는 1981년에 가톨릭 신학교에서 들어갔다. 당시 대학가에는 민주화운동이 넘쳐났고, 그는 미래의 천주교 사제들에게 기도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 덕분에 퇴교를 당했다.

그후 안정선은 군대를 마치고 살레시오 수도회에 들어갔다가 1년 만인 1986년 수도원을 나와 영등포 쪽방촌으로 갔다. 그곳에는 노숙인 치료봉사를 하는 '작은 자매회' 수녀들이 있었다. 안정선은 여기서 노숙인들을 씻기는 일을 했다. 이들에게서 나는 고약한 냄새 때문에 무료치료병원으로 데려가기 어려웠고 수녀들이 남자 목욕을 시킬 수 없어서 그가 나선 것이다.   
 
▲ 영월 요셉의 집에서 안정선 따뜻한 차를 한 잔 나누었다.
ⓒ 민병래
 
그때 안정선의 눈에 쪽방촌 망가방(만화가게를 그곳에선 이렇게 불렀다) 아이들이 들어왔다. 골방에서 섞여 자면서 약에 취해있고 거친 몰골이지만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부끄러워 눈을 돌리는 아이들이었다.

안정선은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이들과 함께 부평 가는 버스에 올라타 신문팔이를 했다. "얼굴을 씻고 신문을 팔아 열심히 살아 보자"고 다독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같이 살겠다며 북한산 청수장 근처 산등성이에 방까지 얻었다.

안정선이 어렵게 '집'을 만들었지만 영등포 쪽방촌에서 따라왔던 청소년들은 간섭(?)이 싫었는지 금세 집을 나가버렸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게 부모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이었다. 얼떨결에 안정선은 스물일곱 살 무렵, 아이들을 돌보는 아빠가 되었다. 어려움이 많았다. 입이 많으니 식비도 문제였고 아이들을 어떻게 돌봐야 할지, 학교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지 난관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때 살레시오 수도회 시절 알았던 김은미가 힘이 되었다. 그녀는 벨기에 신부가 운영하던 데레사의 집에서 나병 환자의 아이들이 사회에 진출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을 했다. 그곳에서 나온 후 김은미는 함께 일하던 이들과 영성공동체를 만들었다. 정릉 산자락에 작은 주택을 얻어 '은총의 집'이라 이름 짓고 갈 곳 없는 아이들을 기르기 시작했다. 안정선보다 몇 해 앞서 행한 일들이었다.

안정선은 김은미를 통해서 자신이 하는 일이 '아동공동생활가정'을 꾸리는 일이고, 고아원처럼 시설에 수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가족처럼 따뜻하게 관계 맺는" 방식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요셉의 집'이라 문패를 달고, '은총의 집'과는 남매 집으로 결연을 맺었다. 두 집은 오누이처럼 성별이 다른 아이들이 들어오게 되는 경우, 남자와 여자아이들을 나눠서 보호하는 식으로 협력했다. 그 연대 속에 안정선과 김은미의 사랑도 시나브로 싹텄다.

영월로 가자!

안정선은 92년, 아이들을 시골에서 키우고픈 마음에 '요셉의 집'을 영월로 옮겼다. 건축비가 없어 안정선이 벽돌 하나하나를 짊어지고 1년여에 걸쳐 집을 지었다. 우선 본채 1층만 짓고 나중에 2층과 별채를 하나씩 덧쌓아갔다.

한편 '은총의 집'도 아이들이 많아져 분가를 결정했다. 아이들이 늘어난다고 시설을 확충하면 규모가 '가정' 수준을 넘어서게 돼 '따뜻한 보호'가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원래 터 잡았던 곳은 '은총의 집 하늘'이라고 하고 영월 요셉의 집 근처에 조그만 집을 마련해 '은총의 집 꿈터'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안정선과 김은미는 부부의 연을 맺었는데 30년 결혼 생활 동안 한번도 주소지를 같이 하지 못했다. 영월과 정릉에서 각자 자기 일에 전념한다는 약속 하에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삼 남매를 낳았으니 가히 신공을 발휘한 셈이다. 덕분에 삼 남매는 영월과 정릉, 아빠 곁과 엄마 곁을 오가며 컸다.
 
▲ 영월 요셉의 집 그가 일일이 벽돌을 지어 만든 공간이다.
ⓒ 민병래
 
안정선은 요셉의 집 아이들과 똑같이 자기 아이들을 키운다고 했건만, 자식들은 알게 모르게 상처가 있었다. 언젠가 큰아들이 크게 반항한 적이 있었다. 당황스러웠지만 돌아보니 아이에게 늘, 참으라고, 넌 부모가 있으니 형들에게 양보하라고, 아이가 무얼 잘해도 칭찬하기보다는 자랑하지 않게 자제시키기만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하는 일로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그 아픔을 감지조차 하지 못했다는 게 가슴이 아팠다.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것 외엔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삼남매는 잘 자랐다. 모두, 교육비 부담이 거의 없었던 산청간디학교를 졸업한 동문이 되었고, 첫째는 대안학교 교사로 둘째는 소설가로 셋째는 싱어송라이터로 푸른 꿈을 펼치고 있다.

그동안 요셉의 집을 거쳐 간 아이들, 열여덟이 되어 자립의 길로 나선 아이들은 몇이나 될까? 은총의 집까지 셈하면 족히 수백 명은 될 것이다. 돌아보면 신기하다. 안정선이 스물일곱, 여덟 나이로 요셉의 집에서 처음 거둔 아이들만 열 명이 넘었다. 그때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도 없었고 후원도 거의 없었다. 아이들은 주로 성당 신부님이나 교우들을 통해 집에 들어왔고 마다한 적도 없었다. 기업이나 정부 지원이 주로 대규모 시설로만 가던 시절이었는데 어떻게 살아냈는지 정말 신기하다.

안정선은 젊었을 때 아이들 삶속으로 깊이 들어가려 했다. 잘 교육시키겠다는 마음에 행동 하나마다 짚어서 이야기를 했다. 지금은 아이들이 스스로 말하게 하고, 하는 말을 잘 들으려 한다. 말을 삼가고 삶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려 한다. 아이들이 제일 민감한 핸드폰 사용도 잠자기 전에는 반납하되 게임은 적당히 하라고 한두 마디 하는 정도다.      
▲ 안정선의 웃음 북한산 산자락에서
ⓒ 민병래
 
세상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안정선은 올해 예순이 되었다. 그가 '아동공동생활가정'을 꾸려오면서 2003년은 중요한 해였다. 정부는 그해 아동정책 방향을 대형시설 중심이 아닌 소규모 양육으로 전환했다.

1953년 휴전 후 수만 명에 달하는 전쟁고아를 수용하기 위해 대형시설이 불가피했다. 이런 유래로 대형기관은 아동보호시설의 큰 축이었다. 하지만 이들 시설에서 발생하는 이른 바 '시설병'은 숙제 거리였다.

학계와 UN도 개선을 권했던 때여서 정부는 아동복지법을 개정하고 요셉의 집 같은 가정을 '시설'로 인정하고 법적 지위를 부여했다. '수용'에서 '가정과 같은 환경을 만드는 것'으로 정책방향을 바꾼 것이다.

이 전환에는 은총의 집 사례가 큰 모범이 되었다. 보건사회부 정책담당자들이 수차례 현장 조사를 나왔다. 이에 따라 하나의 시설에는 어른 2~3명 아이들은 7명까지, 면적 기준도 정해지고 또 대표나 종사자들에게 최저임금 수준이나마 인건비를 지급되기 시작했다.

덕분에 안정선과 김은미도 처음으로 '월급'이란 것을 받아보았다. 처음에는 시설당 1명 인건비만 인정해 함께 있는 이들과 나눠 썼지만 지금은 3명까지 지급되는 것으로 개선되었다. 

안정선은 이제 새로운 모색을 한다. 요셉의 집에서는 65살까지만 일할 수 있다. 안정선보다 네 살 위인 김은미는 2022년이면 은총의 집을 떠나야 한다. 국가가 시설로 지위를 부여하고 인건비를 지급하면서 종사자의 연령 상한을 정했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그는 숟가락 하나 더 놓아서 아이들을 돌보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 꿈을 이제는 정부가 끌어안고 간다. 세상은 그렇게 변했다. 안정선은 비록 요셉의 집은 떠나게 되더더라도 세상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더 많은 일, 더 큰 일을 찾아나서고자 준비하고 있다.

93년 영월 산골에서 조팝나무 화관에 가락지 하나로 연을 맺은 김은미도 그 길에서 물론 함께 할 것이다. 아니, 이번에도 결혼식 다음 날, 새벽이슬에 젖으며 아이들을 돌보러 떠났던 김은미가 앞서가고 안정선은 뒤미처 따라갈 것이다.

못다 한 이야기

① 안정선이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교리 공부를 하고 영세를 받았는데 그때 세례명이 스테파노와 세반스찬 두 개가 내려왔다. 선배가 먼저 스테파노를 택해 그는 할 수 없이 세바스찬으로 정했는데 알고 보니 이 분이 '청소년 수호성인'이었다. 지금껏 걸어온 이 삶은 고등학교 때 이미 정해져 있었던 모양이라고 안정선은 우스개소리를 한다.

⓶ 요셉의 집이나 은총의 집과 같은 '아동공동생활가정'은 전국 400여개에 이른다. 이들 시설에는 평균 3명 정도가 근무한다. 문제는 아이들만 따로 재울 수가 없어 24시간 365일을 같이 생활한다. 이곳 대표나 선생님 들은 휴일도 명절도 챙길 수 없는 상황. 그렇다면 기본급은 최저임금이더라도 호봉제 도입과 시간외수당과 같은 각종수당이 현실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를 도입하는 곳은 서울시 정도이고 나머지 지자체는 아직 지지부진하다. 또 여기에 소요되는 재정이 복권기금에서 충당하고 지급명목도 일자리 창출이며 기재부에서 최소 예산만 배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안정선은 "아이들을 돌보는 어른들이 행복해야 아이들과 '따뜻한 관계'가 가능하다"는 소신으로 정부정책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선 바가 있다. 2014~2019년 한국아동청소년그룹홈협의회(http://www.grouphome.kr)의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제도개선을 위해서 노력했다.

③ 요셉의 집에는 매월 60만원 30년째 기부하는 얼굴없는 천사가 있다. 이런 후원이 요셉의 집이나 은총의 집처럼 초기 '아동공동생활가정'이 버텨오는 힘이 되었다.

④ '시설병'은 흔히 아동인권침해나 학대 등의 문제와 그렇게 양육한 아이들이 시설보호가 종료된 이후에도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아 생긴 말이다.

 안정선의 B컷
 
▲ 요셉의 집 내실 아내와 삼남매가 함께 지내던 요셉의 집 내실
ⓒ 민병래
    
▲ 주방 겸 도서관 요셉의 집, 아이들이 사랑하는 공간이다.
ⓒ 민병래
 
▲ 요셉의 집에서 안정선 영월에는 겨울이 길다.
ⓒ 민병래
     
▲ 안정선의 웃음 돌아보면 아이들 덕분에 잘 살아왔다고 회고한다.
ⓒ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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