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소녀의 그날 밤

2021. 1. 16.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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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지 문화스포츠레저부 기자


그날 소녀의 답장은 끝내 오지 않았다. 올해 10대 후반이 된 그 아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방에 불은 켰을까, 그 방 밖으로 몇 걸음이나 걸어 나왔을까. 수소문을 해보고 싶은데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내가 건넨 말은 “보호자, 경찰 없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였다. 아이는 “고민해보겠다”고 답했다. 그게 다였다. 이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소녀는 ‘n번방 사건’의 피해자다. 지난해 3월 ‘n번방 추적기’ 보도를 본 후 자신을 협박한 사람이 조주빈(구속)이었다는 걸, 직접 찍어 넘겨준 영상이 ‘박사방’에 올라갔다는 걸 알게 됐다. 피해자가 여러 명이라는 사실이 끔찍했지만, 왠지 모를 연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을 거다. 혼자만의 싸움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을 테니. ‘나만 바보 같아 당했던 게 아니었구나’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을까. 그러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진 않았을까. 아이가 부디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하지 않길 빌었다.

‘n번방 추적기’ 1, 2화를 보도한 뒤 온라인에서는 잔인한 일들이 펼쳐졌다. 잔혹한 범행을 기사로 간접 경험하고도 ‘당할 만해서 당했다’는 말을 기어코 내뱉고 있었다. 예상을 못했던 건 아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 그게 3화 공개 전 번외편을 통해 n번방 사건과 보이스피싱 범죄의 교활한 유인 수법을 비교한 기사를 내보낸 이유였다. 후자가 착취하려는 게 돈이라면, 전자는 성(性)이었다.

‘순결한’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며 진정성에 흠집을 내고야 마는 전형적인 2차 가해 패턴은 성범죄 사건마다 이어졌다. 피해자는 절대적으로 약해야 하고, 사생활에 아무런 흠결이 없어야 하며, 범행 직후 줄곧 피해를 호소하고, 우울감에 빠져 있기를 일부 대중은 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야속한 사회를 견뎌내고 있던 소녀가 건넨 그날의 마지막 말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오늘 밤에는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직 받지도 않은 도움인데, 그 기대만으로도 지독한 악몽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는 희망이었을까. 어둠을 헤엄쳤을 아이에게 몇 개월 만에 ‘잠’을 선물한 존재는 그저 아주 작은 관심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는 끝내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날 밤 소녀가 어떤 생각들에 짓눌렸을지는 잘 모르겠다. “누가 아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말에서 이유를 추정할 뿐이다. 이때 내게 중요했던 건 아이가 일시적이지만 꽤 오랜만에 안도감을 느꼈다는 사실이었다. 그날 작은 호의에 아이는 자신처럼 숨어 있는 피해자에게 연대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며 인터뷰를 허락하기도 했다. ‘네 탓’이라는 모진 말들 사이에서 희망을 확인했던 이런 순간들이 겹겹이 쌓였다면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

내가 그날 밤을 떠올리며 수천 번의 자책을 하는 동안에도 우리 사회는 또 다른 2차 가해를 일삼고 있었다. 성폭력 피해자가 고발 전 썼던 편지를 무고의 근거라며 들먹였고, 신상정보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게 과연 미투운동을 끌어내고, 페미니즘을 주류 반열에 올려놓은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인지 두 눈을 의심케 했다.

성폭력 피해자가 범행 후 느끼는 불안·자책·공포 등 일련의 심리 상태는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결코 짐작할 수 없다. 인지 부조화에 따른 심리적 혼란, 이로 말미암은 자책, 가해자와의 관계 융합에서 비롯된 고통을 어느 누가 재단할 수 있을까. 피해자는 충격을 겪으면 사건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방어기제에 휩싸이게 된다고 한다. 사건을 인정하는 자체만으로도 고통을 느껴 한동안 일상적 태도를 유지하려는 심리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적 맥락도 이해해야 한다. 지금이 그렇다. 2차 가해가 얼마나 날카로울지 걱정됐을 거다. 보통은 피해자가 더 폄하되곤 했다.

내가 만난 n번방 피해자들이 사회에 원하는 건 대단하지 않았다. 네 잘못이 아니라는 말 한마디, 도움을 청해도 괜찮다는 작은 성의. 2014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박원순이 내건 슬로건은 이랬다. ‘당신 곁에 누가 있습니까?’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좋겠다. 고인이 된 그를 지키겠다고 당신은 지금 피해자의 곁에 어떤 모습으로 있는가.

박민지 문화스포츠레저부 기자 p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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