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일주일 남았는데, 전 시간 매진입니다

김지섭 2021. 1. 15.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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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사비나미술관, 오스왈도 과야사민 특별전시회 관람기

[김지섭 기자]

나의 그림은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긁고, 때리기 위해,
인간이 인간을 향해 무엇을 저지르는지 보여주기 위해 존재한다.
- 오스왈도 과야사민

한국을 처음으로 찾은 과야사민의 작품을 볼 수 있었던 건, 하나의 경험이라기엔 행운에 가까웠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올라가면서 서울 은평구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는 예약한 사람만이 할 수 있었고, 매 시간 입장하는 예약 인원도 가능한 한 소수여야 했습니다.

제때 예약하지 못한 나는 더 이상 예매할 수 없다는 알림만 며칠째 확인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누군가 예매를 취소했습니다. 마침 사이트를 들락거리던 나는 날짜를 상관하지 않고 바로 예매하였습니다.

관람 마감 시간이 되어 미술관을 나서야 할 때, 과야사민의 작품들 앞에 다시 한번 서 있는 내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이제 나는 재관람을 위해 또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오는 22일까지 일주일 정도 남은 전시회이니 아마 예매하지 않았던 새로운 관람객이 나오는 일은 드물 겁니다.

다음에 다시 과야사민의 작품을 볼 수 있는 날을 기대하는 게 맞겠죠. 우리나라라면 더 좋겠지만, 우리나라가 아니어도 괜찮을 것입니다. 다음에 과야사민의 작품을 다시 바라보는 날에는, 그런 일상이 가능하겠죠. 어딘가를 여행하는 일상과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탄성을 마스크로 가릴 필요가 없는 일상들.
  
▲ 과야사민의 작품들 왼쪽부터 '눈물', '두려움', '분노'
ⓒ 김지섭
 
과야사민은 자신의 책에다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손, 입, 이 또는 눈을 그릴 때 이것은 단순히 조형적 형태가 아니다. 나는 이것을 통해 조형성 그 자체를 넘어서는 것을 표현하고 싶다. 눈은 울고 있고, 이는 악물고 있으며, 고뇌에 찬 손은 떨리고 있음을 표현하고 싶다."

그림은 정지되어 있지만, 그는 정지된 상태를 깨뜨리는 움직임을 지향합니다. 그런데 그 떨림은 두려움과 공포, 분노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분노의 시대' 연작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공포, 분노, 두려움을 담는 육체는 지극히 위태롭습니다. <기다림>이라는 제목으로 묶인 11편의 그림은 얼굴과 전신이 번갈아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의 제작은 과야사민이 과거 유태인 수용소를 방문한 뒤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전시 기념서적의 해설에 따르면 커다란 얼굴과 위태로운 전신이 채워진 사각형의 프레임은 그 비좁음 때문에 관을 연상시킵니다. 그림 속 유태인이 기다리고 있는 건 수용소를 벗어나는 미래일 수도,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죽음일 수도 있습니다.
   
▲ 과야사민의 작품들 왼쪽부터 절규1, 절규2, 절규3
ⓒ 김지섭
 
하지만 과야사민의 작품들이 한 시대에 갇히거나 머무르는 건 아닙니다. 의도와 기획을 벗어나, 시의성과 시대에서 도약하여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절망으로 다가갑니다. 경악과 체념으로 가득한 '기다림' 앞에 서 있는 2021년의 나는, 나의 감정이 순식간에 그 재질이 절망으로 뒤바뀌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치와 유태인과 수용소의 비극적인 시대를 가늠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림 앞에서 사람은 타인에 대한 공감을 잠시 접고 자기 자신의 감정에 매몰됩니다. 그리고 공감의 시작은 미술관을 나선 다음, 미술이 선사한 감정의 파고에 따라 이뤄질 것입니다.

나는 '분노의 시대' 연작 앞에서 절망과 공포에 빠졌습니다. 배치된 작품들 앞을 빠르게 지나쳤다가 느리게 지나치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림 속 경악과 공포에 물든 눈동자를 잊기 힘들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과야사민의 작품에서, 특히 '분노의 시대' 연작에서 손과 눈은 강렬한 흔적을 남깁니다. 인물들은 눈을 감았거나, 손으로 눈을 가렸거나, 정면이 아닌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습니다. 정면을 바라보는 시선도 있지만, 그건 절망하여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놓아버린 그런 눈일 뿐입니다.
   
▲ 과야사민의 작품들 체에게 경의를 표하다 1, 2
ⓒ 김지섭
   
고통스런 육체들의 전시. 놓아버린 눈동자와 도망가고 싶은 손짓들이 너무도 강렬합니다. 그런 개인들이 연달아 전시되어 있으니, 이 공간이 울음과 중얼거림으로 가득해집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통스런 육체가 하나가 아니라는 점은 연대하는 희망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작품 앞에서 관람자에 전이된 그 감정들은 점차 희석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농밀한 공포와 절망이 관람자에게 옮겨간다면, 또는 여러 비슷한 상황을 담은 다른 그림들이 함께 비명을 지르고 있다면 그건 조형을 깨뜨리는 연대의 움직임일 것입니다.

'분노의 시대'를 거쳐 '온유의 시대'로 향합니다. 작가로서 말년에 접어든 과야사민은 부드럽고 안온하고 색채가 도드라지는 그림들을 남깁니다. 분노에서 온유로. 전시회의 흐름도 그렇게 이어지지만, 사실 나는 분노의 시대에서 좀처럼 떨쳐 나오기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와 아이의 모습 앞에서, 강렬한 애착으로 서로를 지탱하는 두 개인의 모습은 위태로움과 안전함을 번갈아 느끼게 합니다. 아이는 그 필연적인 무력감 때문에 어머니의 부드러움 속에 들어앉아 그녀를 강인하게 만듭니다. 아름다움이 아닌 강인함. 과야사민의 온유는 그런 질감입니다.
  
▲ 오스왈도 과야사민 전시회 기념 서적 중 온유
ⓒ 김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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