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형석 (23) 군부대·산업체·NGO.. 교회 밖 신앙운동에 동참

양민경 2021. 1. 15.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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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군부대와 산업체, 병원과 국제구호개발기구 월드비전에서 교회 밖 신앙 운동을 펼쳤다.

직접적인 건 아니었지만, 이들 단체에서 신앙적으로 협력할 기회는 주께서 허락하지 않았다면 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신앙 강연은 아니었기에 군부대 안의 전도에는 직접 영향을 주진 못했다.

교회 밖 신앙운동에 동참하면서 깨달은 또 다른 사실은 '직장 선교가 중요하다고 해서 본래 직책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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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공장 근로자들에게 강연하면서 소외 이웃의 어려운 처지도 알게 돼
김형석 교수(첫줄 왼쪽 두 번째)가 1965년쯤 강사로 나선 월드비전 대학생 수양회에서 단체 사진을 찍은 모습. 김 교수 오른쪽부터 곽선희 이호빈 홍현설 목사. 월드비전 제공


나는 군부대와 산업체, 병원과 국제구호개발기구 월드비전에서 교회 밖 신앙 운동을 펼쳤다. 직접적인 건 아니었지만, 이들 단체에서 신앙적으로 협력할 기회는 주께서 허락하지 않았다면 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교수로 살았기에 이런 기회가 없었다면 우리 사회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처지를 모르고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교수로서 여러 강연을 한 군부대에는 40대 때부터 20년 가까이 봉사했다. 국군방송에선 누구보다 오랜 세월 봉사했고, 군 정신교육 지도위원으로도 참여했다. 신앙 강연은 아니었기에 군부대 안의 전도에는 직접 영향을 주진 못했다. 국방부 강연을 오랜 기간 계속한 건 군부대 일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아내는 이렇게 묻곤 했다. “왜 욕을 먹으면서도 정부 일을 돕는지 모르겠어요. 잡혀가기까지 하면서….” 전두환 정권 당시 경찰 정보과 형사들이 강연 내용을 꼬투리 잡아 집에 전화로 협박을 가할 때가 있었기에 한 말일 것이다. 나는 할 말이 없어 이렇게 답했다. “우리 같은 탈북자는 대한민국밖에 의지할 데가 없는 걸 어떻게 하겠어요.” 탈북자로서 내가 대한민국을 위해 하는 일보다 대한민국의 혜택이 더 크다는 사실은 분명한 사실이니 말이다.

산업체에서 전도 경험은 우연한 기회에 얻었다. 최창근 영락교회 장로가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서 의류공장 ‘동영물산’을 운영했는데, 그는 공장 근로자를 신앙의 길로 이끌기 위해 매 주일 새벽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공장 내 신우회를 조직해 군부대 위문과 소외이웃을 돕는 일도 했다. 그의 산업전도를 지원하기 위해 1965년쯤부터 6년간 목사가 아닌 내가 예배를 맡아 도왔다. 주로 인생관과 가치관, 일을 사랑하는 삶의 자세를 설교했다. 63년 을지로6가의 국립병원에서도 2년간 예배를 인도했다. 나는 이 과정에서 ‘직장전도 활동이 교회 운동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굳혔다. 신앙과 진리를 교회라는 형식의 그릇에만 담아둘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의 양심과 생활의 터전에서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월드비전은 64년 여름 신앙수련회 강사로 초빙되면서 인연을 맺었다. 이후 매해 월드비전 수련회 강사로 초청받았기에 타 강사 및 여러 회원과 깊은 신앙적 우정도 나눌 수 있었다. 강남대 설립자 이호빈 목사와 홍현설 전 감리교신학대학교 총장, 성결교의 정진경 목사와 장로교의 곽선희 목사 등을 그렇게 만났다. 강연을 계속하면서 월드비전 이사도 맡았다. 지금도 명예이사다.

교회 밖 신앙운동에 동참하면서 깨달은 또 다른 사실은 ‘직장 선교가 중요하다고 해서 본래 직책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나 역시 교수와 수필가, 신앙인으로서 1인 3역을 했지만, 학문적 책임과 신앙적 책임을 혼미하게 처리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최선의 길을 택하진 못해도 가능한 차선의 길은 택하면서 살아왔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누가 어떻게 평하든 나는 주님 앞에서 종으로 살아왔다. 6·25전쟁 이후부터는 종이라기보다 주의 지게꾼으로 살길 원했다. 당시 시대와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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