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서울야곡'과 '합창교향곡'의 도시풍경
접근성 좋은 도심에 배치해야
상권에 활기 생기고 도시 살아나
외따로 떨어지면 교통 체증만 유발
“마로니에 잎이 나부끼는/네거리에 버린 담배는/내 맘 같이 그대 맘 같이 꺼지지 않더라.” 담배꽁초 무단투기는 과태료 5만 원이라고 지적하면 곤란하다. 1950년의 그는 실연의 우수를 털어내기 위해 도시를 방황 중이다. 이 노래 ‘서울야곡’의 시작은 이렇다.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쇼윈도 그라스에 눈물이 흘렀다.”
가사 속의 그는 한숨 어린 편지를 찢어버리고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 나온 참이었다. 지척이던 걸음으로 좀더 가면 안국동 네거리다. 그리고 율곡로에 접어들 것이다. 나부끼던 마로니에 잎은 낙엽 되어 떨어지겠다. 그런 계절이 몇 번, 혹은 수십 번 지나가겠다. 그렇게 어떤 공원에 이르러 그는 잠시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가 충무로를 떠났을 때 이곳은 대학캠퍼스였다. 그 대학이 관악산으로 옮기고 남은 터는 주택가로 변했다. 그 일부를 비워 만든 것이 마로니에 공원. 그 구석에 새로 지은 벽돌 건물 두 채의 이름은 ‘문예회관’.
공원 주변에 맥주집 한두 곳 박혀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곳의 청춘 해방구 돌변 기폭제는 대학로라는 명명에 따른 주말 자동차 통행금지였다. 대학로는 지금 전국 최고의 소극장 밀집 지역이다. 그 공연이라는 방향 설정은 대학로 명명이 아니고 ‘문예회관’의 존재 덕분이다. 지금 이름은 ‘아르코예술극장’이다. 이렇게 주변 도시를 바꾸는 핵심건물을 거점시설이라고 부른다. 건물이 잉태하고 잉태하여 도시를 바꾼다.
문화시설이 주변을 문화도시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문 닫힌 신전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면 문화적 허영심 발산·해소처거나. 문화거점시설 성공의 우선 조건은 입지설정이다. 사람들이 어슬렁거릴 주변 환경이 있는 곳에 자리 잡아야 한다. 성공사례 뒷면에 실패사례가 있다. 초대형 문화시설인 ‘예술의전당’ 전면은 왕복 10차선의 남부순환도로고, 후면은 우면산이다. 이곳은 변화시킬 주변이 없다. ‘예술의전당’은 그 내재적 문화폭발력에도 불구하고 밀봉된 문화철옹성, 도시의 폐쇄회로가 되었다. ‘예술의전당’이 길 건너에 배치되었다면 지금 서초동은 전체가 예술도시로 변모해 있을 것이다.
아직 개탄은 이르다. 우리에게는 전 세계가 경이롭게 보아 마땅한 희귀사례가 있으니 ‘국립현대미술관’이다. 이 미술관의 전면은 과천저수시, 후면은 청계산이다. 템플스테이해야 할 법한 오지에 미술관이 자리 잡았다. 그런데 미술관에서 굽어보면 오른쪽은 놀이공원, 왼쪽은 동물원이다. 앞뒤로 엄숙하고 좌우로 명랑한 희극적 배치다. 이런 곳에 미술관을 점지한 것은 문화는 고고·우아·고상해야 한다는 신념의 소산일 것이다. 그래서 문화시설은 근엄·장엄·엄숙해야 하는 신전에 가까운지라 도시에서 멀어졌다. 그 덕에 여름철 애인 동반의 보행 방문객들 등에 땀방울이 흘렀다. 그들의 실연 후 쇼윈도 그라스에 눈물이 흐르듯.
실연의 방랑자가 더 걷는 동안 세상이 좀 바뀌었다. 문화시설이 접근성 좋은 도심에 있어야 한다고 깨달았다. 결국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생겼다. 최고의 입지다. 그런데 문화시설이 곧 거점시설이 되지는 않는다. 문화시설의 도시 내 역할은 집객이다. 연주, 관람 전후에 방문객이 먹고 마시고 쉬고 구경해야 하는데 이건 주변의 도시에서 해결할 일이다. 그러면 상권이 살아나고 고고·우아·고상하게 도시가 바뀌기 시작한다. 이때 문화시설은 거점시설이 된다. 거점시설로서 문화시설이 갖춰야 할 요소는, 아니 배제해야 할 요소는 자체 내 소매점이다.
한국에서 정부 투자의 문화시설 건립 이후 요구하는 것이 독자생존이다. 이건 전 세계적으로 성공가능성이 희박한 조건이다. 입장수입 빈궁한 문화시설이 독자생존 압박하에서 선택하는 것은 내부 소매시설 확보다. 그 순간 문화시설은 주변도시와 상권 경쟁관계의 요식업 임대시설이 된다. 고립시설로서 교통체증 유발의 민폐만 주변에 끼친다. 문화시설에서 독자생존 요구보다 중요한 가치는 도시의 변화 가능성이다. 문화시설 지원금 투자보다 훨씬 더 큰 도시활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범국민적 가택연금으로 이번 신년·송년음악회 거의 다 취소되었다. 그러나 마로니에잎이 피고 지고 나면 실연(失戀)의 아픔은 잊히고 실연(實演)의 음악당은 다시 활짝 열릴 것이다. 원래 송년음악회에서는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이 필수, 신년음악회에서는 요한슈트라우스의 왈츠가 양념이다. 신년음악회에서 ‘라데츠키행진곡’에 맞춰 발 구르고 박수 친다고 도시가 바뀌지는 않는다.
매상 증가 기대로 주변 상가들도 음악회가 기다려지는 게 중요하다. ‘합창교향곡’의 감동에 겨운 청중들이 늦은 밤이라도 귀가하지 않고 근처 맥주집으로 향할 수 있어야 하겠다. 맥주집 주인이 그들을 ‘합창교향곡’ 가사처럼 “오 친구여(O Freunde)!”라고 반겨주면 그게 문화도시겠다. 뒤늦게 합석한 바이올린 주자가 맥주집 주인 애창곡 ‘서울야곡’을 탱고 선율로 들려줄 수도 있겠다. 그때 내 맘같이 그대 맘같이 불 꺼지지 않는 멋진 도시에서 모두 발 구르며 외칠 것이다. 앵콜!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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