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 봉오동을 독립전쟁의 전진기지로

김삼웅 2021. 1. 14.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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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운산 형제들은 봉오동을 독립전쟁의 전진기지로 만들었다.

둔전에서 시작한 봉오동이 자위단을 거쳐 무장독립군 기지로 알려지면서 애국청년들이 모여들자 산중턱을 벌목하여 연병장을 건설하고 베어낸 나무로 수백 명이 거처할 숙소로 대형막사 3개동을 건축하였다.

일본 정규군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병사들의 실전훈련을 강화하고, 사기를 위해 독립군가를 주민들과 함께 불렀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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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회] 봉오동 둘레에 견고한 토성을 쌓고 방어체제를 갖추었다

[김삼웅 기자]

 
  ‘봉오동 반일 전적지’기념비가 있는 봉오저수지 입구. 일대가 모두 전적지이겠지만, ‘봉오동전투’가 일어났던 계곡과 마을은 물에 잠겼더군요. 서운했습니다.
ⓒ 조종안
 
최운산 형제들은 봉오동을 독립전쟁의 전진기지로 만들었다.

물적 기반을 갖추기 위해 자신들의 소유지에 콩기름공장ㆍ국수공장ㆍ주류공장ㆍ성냥공장ㆍ비누공장ㆍ콩과자공장을 비롯한 다양한 생필품 기업을 설립해 경영하였다. 뿐만 아니라 축산업을 통해 소와 돼지를 키워서 무기를 구입하는 데 유용하게 쓰였다. 

봉오동은 대표적인 둔전제로 시작되었다. 3ㆍ1혁명 후 급조된 독립군부대가 아니라 1912년부터 장기간의 준비와 훈련으로 실력을 쌓은 정예부대가 되었다. 봉오동 둘레에 견고한 토성을 쌓고 방어체제를 갖추었다. 

봉오동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가족들도 군복을 짓거나 병사들의 음식을 마련하는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봉오동에 살던 아낙네들은 대부분 독립군의 가족들이었고 여성들도 총을 쓸 줄 알았다. 김성녀 여사는 대범하고 겁이 없는 분이었다. 봉오동 독립전쟁 때 최운산 장군과 지휘부는 봉초봉에 전투본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때 중요한 첩보가 도착하면 산위에 자리한 독립군부대 본진에 그 첩보를 전하는 역할도 김성녀 여사가 직접 했다. 긴요한 첩보를 남에게 맡길 수 없었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주석 5)

둔전에서 시작한 봉오동이 자위단을 거쳐 무장독립군 기지로 알려지면서 애국청년들이 모여들자 산중턱을 벌목하여 연병장을 건설하고 베어낸 나무로 수백 명이 거처할 숙소로 대형막사 3개동을 건축하였다. 본부 둘레에 대규모 토성을 축조하여 사방에 포대를 쌓고 대포를 배치하는 등 견고한 독립군기지를 만들었다. 

일본 정규군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병사들의 실전훈련을 강화하고, 사기를 위해 독립군가를 주민들과 함께 불렀다.

당시 대한독립군과 항일국민회군이 불렀던 독립군가는 군무도독부 그리고 대한북로군정서 등 무장독립군 진영에서 널리 애창되었다.

            독립군가

 나아가세 독립군아 어서 나아가세
 기다리던 독립 전쟁 돌아왔다네
 이때를 기다리고 10년 동안에
 갈았던 날랜 칼을 시험할 날이
 나아가세 대한민국 독립 군사야
 자유 독립 광복함이 오늘 이로다
 정의의 태극 깃발 날리는 곳에
 적의 군세(軍勢) 낙화같이 쓰러지리라. 

 탄환(彈丸)이 빗밭같이 퍼붓더라도
 창과 칼이 네 앞에 가로막아도
 대한의 용장한 독립 군사야
 나아가고 나아가고 다시 나가라
 최후의 네 핏방울 떨어지는 날
 최후의 네 살점이 떨어지는 날
 네 그리던 조상 나라 다시 살리라.
 네 그리던 자유꽃이 다시 피리라. (주석 6)
 
 최운산·최진동 형제
ⓒ 최성주
 
최운산 형제들은 봉오동에서 수년에 걸쳐 양병을 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뒷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낸 사학자 박은식은 이 시기 간도와 러시아 해삼위 등지의 독립군 용사들이 어려운 여건에서도 국권회복을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나는 요즈음 중국과 러시아령 사이를 여행하면서 각처를 두루 돌아보고  동포들을 방문하여 보았다. 그들은 산에서 사슴을 쏘고 시장에서 땔나무를 팔며, 감자를 심어 양식으로 삼고 엿을 팔아 먹고 살았으니 이들은 모두 지난날의 의병 장령이었다. 그들은 쓰러져 가는 집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떨면서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고, 오로지 노래하고 읊조리는 것은 조국 뿐이며 자나깨나 조국이었다.

술을 마신 후에는 비분강개하여 서로 노래부르고 통곡했다. 세속의 소위 명예나 공리 따위는 몸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겼다. 오직 몸속 가득한 끓는 피는 충의와 비문에서 터져 나왔고(그들의 투쟁은) 죽은 후에라야 끝날 결심이었으니 이 어찌 참된 의사(義士)가 아니겠는가? 나는 심히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주석 7)

주석
5> 최성주, 앞의 책, 100쪽.
6> 『독립신문』, 대한민국 2년 1월 27일치.
7>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상권, 637쪽, 형성출판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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