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톺아보기]이 시대의 로맨스가 사는 법

이종길 입력 2021. 1. 13.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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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제발 그 남자 만나지 마요'

한때 안방극장에서 가장 사랑받은 드라마는 로맨스였다. 의학드라마, 법정드라마, 수사드라마 등 장르물을 표방하더라도 필수 흥행 요소로 인식됐다. 비단 국내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한류를 주도한 작품들도 대부분 로맨스다. '욘사마' 열풍의 시초인 '겨울연가(KBS)', 전지현과 김수현을 최고 한류 스타로 등극시킨 '별에서 온 그대(SBS)', 송중기를 한류의 제왕으로 만든 '태양의 후예(KBS)'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정통 로맨스는 실종되다시피 했고, 다른 장르적 요소를 결합한 복합장르 로맨스조차 부진한 성적을 내고 있다. 지난해 성공작으로 꼽히는 드라마들 가운데 로맨스는 '사랑의 불시착(tvN)'이 유일하다. 반면 새로운 한류를 이끄는 글로벌 스트리밍 업체 넷플릭스를 통해 국내외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작품들은 죄다 장르물이다. '킹덤', '스위트홈(이상 넷플릭스)', '이태원 클라쓰(JTBC)', '경이로운 소문(OCN)' 등이 대표적 사례다.

로맨스 장르의 침체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한다. 신데렐라 스토리와 같은 진부한 전개, 스타 캐스팅과 볼거리에만 치중하다 부실해진 완성도 등의 내부적 요인은 이미 한참 전부터 지적되어왔다. 더 중요한 요인은 시대정신의 변화에 있다. 정확히는 로맨스 장르의 주시청층이었던 여성들의 변화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급부상한 페미니즘 열풍으로 인해 남녀 관계를 위계적으로 그리는 로맨스를 재평가하고 있다. 가령 과거에는 로맨틱한 장면으로 여겨진 기습 키스·공개 고백·들쳐업기 등의 신에서 '데이트 폭력' 미화 위험을 지적하고, 여성 캐릭터는 수동적·남성 캐릭터는 능동적으로 그리는 성차별적 묘사에 이의를 제기한다.

대표적 사례가 '더킹: 영원의 군주(SBS)' 논란이다. 로맨스 장르의 거장 김은숙 작가가 내놓은 이 판타지로맨스는 지난해 4월 첫 방영 전까지 최고 기대작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공개와 동시에 반전이 일어난다. "와이어 없는 속옷은 가슴을 못 받쳐 준다"는 극 중 여성 총리의 대사나 '백마를 탄 왕자님'과 같은 시대착오적 장면 등 작품 곳곳에서 드러나는 성인지 감수성 부족 때문이었다. 엄청난 민원으로 이어졌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양성평등 저해로 행정지도 처분을 내렸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로맨스 장르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제발 그 남자 만나지 마요(MBC every1)'는 이 같은 질문에 답하는 작품이다. 단순 시청률만 보면 흥행 부진작에 속하지만, 그간 로맨스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온 남녀 관계의 불안을 정면으로 응시한다는 점에서 이 장르의 진화라 평가할 만하다. 극 중 주인공인 서지성(송하윤)은 첨단 기술 제품 개발업에 종사하는 프로그래머다. 일과 연애 모두 순조롭던 삶은 그녀가 개발하던 AI 냉장고에 버그가 발견되면서 완전히 뒤바뀐다.

냉장고의 오작동은 개인정보를 순식간에 끌어모아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의 숨겨진 진실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 주로 여성들을 기만해왔던 남성들의 비열한 민낯이 드러난다. 서지성의 사생활을 불법촬영하고 단체채팅방에 배포한 약혼자, 사내 익명 게시판에서 서지성에 대한 성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루머를 확대 생산하던 직장 동료, 서지성의 후배에게 데이트 폭력을 일삼던 남자친구 등의 범죄가 차례로 폭로된다. 이 정도면 오류가 아니라 시대에 역행하는 '쓰레기 같은 남자들'을 분리수거 해주는 진정한 '인간 감별사'다.

드라마는 남자에 대한 신뢰를 잃었던 서지성이 새로운 사랑에 빠지는 모습을 통해 로맨스 장르가 더는 간과해서는 안 될 질문을 탐구한다. 예컨대 서지성은 AI도 분석해내지 못하는 남자 정국희(이준영)에게 끌리면서도, 그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끊임없이 묻는다. 답을 알게 될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이 시대의 로맨스는 그렇게 '운명적 인연'의 판타지를 벗어나 인간과 관계에 대한 이해를 먼저 요구한다.

김선영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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