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는 아이 마음, 내가 이걸 몰랐구나
[서지은 기자]
컴퓨터 방에 카메라 충전선이 있으니 가져다 달라고 했는데 남편이 없다고 한다. 거기 노트북 근처에 있다고 말해줬는데도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한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 방에 갔다.
"여기 있잖아. 이게 안 보여?"
"이게 충전선이 아닐 수도 있잖아. 어떻게 확신해?"
다른 카메라와 달리 충전선이 독특하게 생긴 구형 디지털 카메라다. 우길 걸 우겨야지 이 남자가 왜 이러나 싶었지만 참고 카메라와 충전선을 연결해 램프에 빨간 불이 들어오는 걸 보여줬다. 이번엔 빨간불이 들어온다고 다 충전되는 건 아니라면서 그 선이 아니라고 한다.
이쯤되면 막 나가자는 거다. 충전램프에 불이 들어왔는데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남편에게 너무 화가 났다. 혈기 왕성한 30대의 난 충전선을 잘라 버렸다. 이게 충전선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필요없는 거겠네?라면서.
이 사건이 있은 지 2년 후 우연한 계기로 부부상담을 받게 됐다. 서로의 성격을 얘기하다가 남편의 고집 스러움을 이야기하면서 위 사건을 말했다. 빨간 불이 들어오는 걸 보고도 왜 충전선이 아니라고 했는지 상담사가 묻자 남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만 대답했다. '부인 말이 맞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말도 안 하고 끝까지 '아닌 것 같았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자신의 생각만 주장하고 사실에 대한 것은 외면했다.
이런 똥고집 남편을 보면서 정말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생각이 달라서 자기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고 눈앞에 보이는 사실을 놓고도 자기 주장하는 게 고등교육을 받은 지성인의 모습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7살짜리 애가 떼를 쓰는 게 낫겠다 생각했다.
이제 곧 생일이 지나면 9살이 되는 아이가 지난 1월 3일부터 겨울방학이라고 우긴다. 학사일정에 1월 8일부터 겨울방학이라고 나와 있어서 주간학습 계획표를 보여줘도 '그건 겨울방학 숙제겠지' 하면서 우긴다. 선생님이 줌수업 때 분명 1월 3일이라고 했단다. 아이가 떼를 쓰면 나을 줄 알았는데 똥고집 아빠 닮아서 그러는 거 같아 더 화가 난다.
"그러면 겨울방학이니까 이번 주 줌 수업 안 해도 되겠네? 엄마는 방학이 아닌 거 같은데 너가 방학이라니까 줌수업 안 틀어줘도 되는 거지?"
충전선을 자를 때나 지금이나 협박과 응징으로 사건을 종료시키려는 모자란 나. 아이는 울고불고 난리치며 줌수업을 할 거란다. 겨울방학이지만 줌수업은 할 거란다.
빨간불이 들어왔지만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남편과 겨울방학이지만 줌 수업을 하겠다는 아이가 겹치면서 어지러움이 몰려온다.
아이를 재우고 아이가 어떤 마음으로 겨울방학 주장을 굽히지 않았을지 생각해 봤다. 갈등이 있을 때 아이가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그 마음을 알아주라고 하던데 꼭 이성적으로 이겨 먹으려는 못난 에미를 잠시 접어뒀다.
▲ 틀려도 괜찮아 표지 |
ⓒ 토토북 |
이럴 땐 그림책을 찾아보면 된다. 아이들 마음이 들어 있는 그림책에서 힌트를 얻어보자.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아이가 나오는 그림책이 어디 없나 책장을 살펴보는데 <틀려도 괜찮아>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틀려도 괜찮아, 교실에선/너도나도 자신있게
손을 들고/틀린 생각을 말해/틀린 답을 말해.
시작 페이지에서부터 틀려도 괜찮다고 말해 주는 <틀려도 괜찮아>는 틀리는 걸 두려워하는 아이들을 위한 책이다. 언제나 맞는 답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틀리는 게 무섭고 두려워서 손을 못 든 채 작게 움츠려 드는 아이들을 위해 선생님이 틀려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틀려도 괜찮아>. 여기선 구름 위의 신령님도 틀릴 때가 있다고 한다.
▲ 틀려도 괜찮아 책 중 일부 장면 |
ⓒ 토토북 |
선생님에게 지목 받아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선 아이는 가슴이 뛰어서 모든 걸 다 잊어버리고 만다. 처음부터 맞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라며 자꾸자꾸 말하다보면 하고 싶은 얘기의 절반 정도는 말할 수 있게 된다고 얘기해준다.
틀렸다고 웃거나 바보라고 놀리거나 화내는 사람은 없으니 틀리면 친구들이 고쳐주고 가르쳐주면 된다고 그런 교실을 만들자는 책. 절대 기죽지 말라고 용기를 주는 이 책을 동글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샀다.
아이들이 너도나도 손을 들면 자신에게 기회가 안 올까 봐 지레 겁먹고 손을 안 들곤 하는 아이가 학교에 가서 틀릴까 봐 손을 들고 싶어도 못 들 수도 있겠다 싶어서 사준 그림책이었다. 그럼에도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직설적으로 나와 있고, 교훈 같은 이야기, 이상 같은 이야기여서 별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다시 보니 아이 마음이 이해가 됐다.
겨울방학이라고 우기는 아이 마음, 자신이 틀린 걸 인정하지 않는 그 마음은 두려운 거였다. 틀린 답을 말할까 봐 손을 들지 못하는 거나 자신이 말한 게 틀렸다는 걸 인정하는 게 힘든 거나 같은 마음이었다. 겨울방학이 1월 3일이 아니라 8일부터라고 잘못된 걸 고쳐주려고 할 게 아니라, 잘못 알 수도 있다고 말해줬어야 했다.
틀린 걸 말해도 괜찮은 너그러운 허용을 받고 자란다면 아이는 자신이 틀린 걸 인정하면서 성장할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틀린 걸 맞았다고 고집부리는 게 아니라 틀린 걸 인정하는 거니까.
아이의 마음을 알고 나니 이기적인 똥고집쟁이로만 보였던 남편도 이해하게 됐다. 우리 누구나 아직 덜 자란 아이를 품고 있다. 그의 마음 속에도 아직 틀리면 안 되는 틀리는 게 두려운 아이가 있는 것 같다. 우리 집 두 아이에게 <틀려도 괜찮아>를 같이 읽어줘야겠다. 틀려도 괜찮으니까 두려워하지 말자를 우리 집 가훈으로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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