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부재, 남겨진 아이들..지금 우리의 문제를 꼬집는 영화 '아무도 모른다' [강주희의 영상프리즘]

강주희 2021. 1. 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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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 '아무도 모른다'
되풀이되는 아동방치 문제 어떻게 바라봐야할까
영화 '아무도 모른다' 스틸 이미지./사진=네이버 영화

[아시아경제 강주희 기자] [편집자주] 당신은 그 장면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요. 문득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를 때가 있지 않으신지요. 이는 영화가 우리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화는 현실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영상 속 한 장면을 꺼내 현실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전해드립니다. 장면·묘사 과정에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04년 개봉한 일본 영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는 1988년 도쿄 도 도시마구에서 실제 일어난 '니시스가모 네 아이 방치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입니다. 아버지 없이 아이를 키우던 엄마가 집을 나간 후 수년 동안 방치된 네 아이의 삶이 집주인의 신고로 드러난 사건입니다.

아이들은 모두 출생신고도 되어 있지 않았으며, 학교에 간 적도 없었습니다. 발견 당시 이들이 살던 집의 전기와 수도는 끊어진 지 오래였고, 집안은 온통 쓰레기로 가득했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사는 도시 도쿄에서 어느 누구도 아이들의 방치된 삶을 눈치채지 못한, 타인에 무관심한 일본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도 모른다'는 엄마와 장남인 아키라가 새로운 전셋집에 입주하며 이웃에게 인사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아이가 많은 가정을 꺼려하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아키라를 제외한 나머지 세 아이는 이삿짐과 트렁크에 숨어들어오게 됩니다.

어렵게 마련한 전셋집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이들은 집 안에서도 떠들지 않기, 외출하지 않기 등 지켜야 할 규칙을 만들어 생활합니다. 이웃에겐 거의 없는 존재와 다름없는 아이들이지만, 서로 의지하며 나름대로 자신들만의 안락한 공간을 만들어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당분간 돌아오지 못한다는 메모와 함께 약간의 돈을 남긴 채 집을 떠나고 아키라 혼자 어린 동생들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내몰립니다. 네 식구가 살아가기 턱없이 적은 돈을 절약하며 버텨보지만, 현실은 겨우 10살 남짓의 소년이 견디기엔 가혹했습니다.

간혹 현금을 보내주던 엄마의 등기 편지도 끊기고, 얼굴도 이름도 잘 모르는 아빠를 찾아 나서 도움을 구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겨울과 봄이 지나 여름이 되기까지 6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아이들이 만들어 놓은 안락한 공간도 점점 일그러져가게 됩니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 스틸 이미지./사진=네이버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아동 방치라는 비극의 참상을 극적으로 그리기보단 아이들의 일상을 관조(주의 깊게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하는 촬영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가져오는 대부분의 영화는 사실성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주기 위해 '실화'라는 점을 적극 이용합니다. 허구로 만들어진 이야기인 영화가 사실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극의 몰입감을 더해주기 위함이지요.

실제 사건과 실존했던 인물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구성하고, 주인공은 사건을 추적해 악당을 찾아내 심판함으로써 갈등을 극복할 지점을 만들어내는 것이 실화 기반 영화의 주요 특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 영화로는 대표적으로 광주 인화학교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한 황동혁 감독의 '도가니',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을 바탕으로 한 장준환 감독의 '1987' 등이 있습니다.

반면, '아무도 모른다'는 실화를 소재로 하면서도 사건의 전개와 해결에 중점을 두기보단 아이들의 일상을 그저 바라보는 방식에 집중합니다. 영화에서 아이들을 버린 무책임한 엄마를 비난하거나, 심판하는 극적인 순간은 연출되지 않습니다.

다만 아이들에게 닥친 비극이 어떻게 서서히 이들의 안락한 일상을 앗아가는지 보여주는 방식을 택합니다. 엄마가 떠나기 전 손톱에 발라준 매니큐어가 점점 옅어지는 모습은 어른이 부재하는 동안 아이들이 겪었을 시간과 고통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느끼게 합니다.

그새 커버려 작아진 신발을 신고도 투정 한 번 부리지 않는 아이들, 마땅히 갖고 놀 장난감이 없어 수도와 전기를 중단한다는 안내문에 그림을 그리고, 끼니를 때우다 남은 컵라면 용기에 식물을 키우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은 이들에게 닥친 현실의 가혹함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영화의 이 같은 촬영 방식은 객관적이고 절제된 시선으로 비극의 근본적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에 관한 생각을 되새기게 합니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 스틸 이미지./사진=네이버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서 그려지는 일들은 우리의 삶과 무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국에서도 부모에 의해 아이들이 방치된 사건은 지속해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9월 인천에선 라면을 끓이다 화재로 형제가 중상을 입고 동생이 숨지는 사건, 11월엔 전남 여수에서 냉장고에 갓난아기 시신을 유기하고 다른 자녀들을 쓰레기 더미에 방치한 사건 등이 발생했습니다.

아동방치 사건의 심각성은 통계로도 드러납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아동학대 신고 건수는 지난 2015년 1만9214건에서 △2016년 2만9674건 △2017년 3만4169건 △2018년 3만6417건 △2019년 4만1389건으로 5년 새 두 배 이상으로 크게 늘었습니다.

피해 사례로는 지난 2019년 기준 여러 학대가 복합적으로 나타난 경우(1만4476건)가 가장 많았고, 정서적 학대(7622건), 신체적 학대(4179건), 방임(2885건), 성적 학대(883건) 등이 뒤를 이었습니다. 학대를 받아 사망한 아동은 2019년에만 42명에 달합니다.

아동 방치사건이 발생한 일차적 원인은 아이를 버리고 떠난 부모의 무책임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이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이유로 문제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사회의 시스템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습니다.

인천에서 발생한 화재사건의 피해자 형제는 사고 전, 이미 아동보호기관과 경찰 등에 수차례 어머니의 방임·학대로 신고가 접수된 바 있습니다. 아동보호전문기관은 지난해 5월 법원에 형제를 어머니로부터 격리하는 피해아동보호명령을 청구했지만, 격리 조치 없이 상담위탁 판결만이 내려졌습니다.

같은 해 10월 양부모의 학대로 16개월 입양아 정인이가 사망한 사건 또한 3차례의 아동학대 신고가 있었음에도 학대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돌려보내졌습니다. 아동 학대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막지 못한, 사회 안전망 미흡과 제도의 총체적 부실이라는 지적이 따르는 이유입니다.

실화의 사실성을 강조하지 않고, 아이들의 일상을 담담히 그려낸 '아무도 모른다'의 촬영 방식은 이 같은 비극의 원인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한정할 수 없다는 인식, 방치된 아이들의 존재를 '아무도 모르는' 사회 시스템 부재를 꼬집고 있습니다.

영화는 지금껏 우리는 무엇을 몰랐고, 앞으로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관객들에게 던지고 있는 건 아닐까요. 한편으로 영화는 실화를 재현할 때, 혹은 카메라가 현실을 포착할 때 어떠한 태도로 대상을 바라보고 다가가야 하는지에 대한 윤리의 문제를 생각하게 합니다.

강주희 기자 kjh818@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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