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태 칼럼] 선택적 인권, 선택적 침묵

입력 2021. 1. 12. 04:0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추미애는 취임사에서 강조한 인권을 진영 보호 기제로 활용
상대방엔 이중적 잣대 들이대

인권이 진영논리에 갇혀 사회 약자는 사각지대 몰려… 방역 참사 구치소가 인권유린 현장
윤석열 쫓아내기에 매몰된 탓

장관 책임 회피하고 대통령은 신년사 언급조차 없어, 원인 규명과 책임 반드시 뒤따라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1년 전 취임사에서 유달리 인권을 강조했다. “법무부 장관은… 교정과 범죄예방, 인권 옹호, 출입국 관리에 있어서도 인권의 가치와 법치가 현장에서 제대로 구현되는 법무행정을 펼치겠습니다.” 이어 “인권 옹호의 주무 부처인 법무부는… 인종과 신념, 계층과 신분 등에 의해서 주권자 국민의 인권이 훼손되거나 차별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며 인권 수호를 다짐했다.

법무행정의 최고 책임자가 인간의 보편적 권리인 인권을 언급한 건 당연한 일이다. 한데 추 장관의 인권 역설은 예사롭지 않았다. 검찰과의 일전을 앞둔 상황이라 경고장을 날리는 차원으로도 인식됐다. 전임인 조국 전 장관이 검찰의 칼날에 낙마하고 인디언 기우제식 수사로 탈탈 털린 것을 목도했으니 ‘우리 진영’을 지키기 위한 방패로 ‘인권’이 딱 들어맞았을 터다. 그러니 피고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와 사건관계인의 인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울산시장 선거개입 사건의 공소장을 비공개하는 등 진영 보호를 위한 도구로 써먹은 게 아닌가. 인권을 명분 삼아 검찰 개혁도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정권이 강조한 인권도 상대방 진영에는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윤석열 검찰총장 측근인 한동훈 검사장을 겨냥해 피의자 휴대전화 잠금 해제를 강제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 제정 검토를 추 장관이 지시한 것은 인권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다. 피의자의 진술거부권과 방어권을 정면으로 침해한 것이라는 여론의 비판에 무산되긴 했지만 권력에 의한 선택적 인권의 잣대는 자칫 헌법 정신까지 훼손할 수 있음을 교훈으로 남겼다.

이렇듯 천부적 권리인 인권이 진영논리 안에 갇히니 진영 바깥의 사회적 약자는 인권의 사각지대에 남을 수밖에 없다. 그 선택적 인권이 서울동부구치소 코로나19 방역 참사로 이어졌다. 확진자가 1000명을 훌쩍 넘은 동부구치소는 인권 유린의 현장이 됐다. 외부와 단절된 수용자들에 대한 교정 당국의 무관심이 낳은 결과다. 지난해 11월 27일 첫 확진자 발생 이후 3주가 지난 뒤에야 전수조사를 실시할 정도로 방치해 놓은 결과, 단일 시설 최대 확진자가 나왔으니 정부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게다.

예방 조치 부실, 초기 대응 실패, 늑장 대처, 주먹구구식 대응 등 총체적 난맥상이 드러났다. 충격적인 것은 구치소가 3밀(밀폐·밀집·밀접) 형태의 취약시설임에도 신규 입소자를 제외한 수용자들에게 방역의 기본인 마스크도 지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감염에서 자신을 방어할 권리도 박탈당한 채 개 돼지처럼 취급된 것과 다름없다. 법무부는 예산 부족을 핑계로 댔으나 군색한 변명이다. 지금 와서야 매일 ‘1인 1마스크’를 지급한단다. 그렇다면 그 사이 없던 돈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는 말인가. 과밀 수용이 원인 중 하나였다면 더욱 선제적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오죽하면 국가인권위원회가 어떤 조건에 있든 그 사람의 생명과 건강이 차별 없이 보호돼야 한다는 인권의 원칙을 강조하고자 성명을 발표한다고 했을까.

교정 업무를 총괄하는 추 장관이 1년 내내 윤 총장 쫓아내기에만 골몰했으니 구치소가 눈에 들어왔을 리 없다. 특히 집단감염 확산 시기가 윤 총장 징계 청구에서 정직 2개월 의결에 이르기까지의 시점과 맞물려 있던 점에 비춰 수용자 안전과 생명, 인권은 뒷전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추 장관은 국회에 나와 “할 수 있는 적절한 조치를 했다”며 책임을 회피하면서 남탓만 한다. 철저한 원인 규명과 교정 당국자들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이 뒤따라야 할 테다.

추 장관의 무책임한 태도는 문재인 대통령의 30년 전 기고문까지 소환되도록 했다. “재소자는 별세계의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일부이다. 그들을 인권의 사각지대에 방치하고서는 민주화를 말할 수 없다… 그들에 대한 인권 유린과 열악한 처우는 한쪽 선수를 묶어 놓고 권투 시합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대통령이 인권 변호사 시절인 1991년 기고한 ‘갈수록 악화되는 재소자 인권’이라는 글이다. 대통령이 동일한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면 진작 추 장관을 따끔하게 질타했어야 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어제 신년사에서 K방역을 자찬하면서도 국가관리시설인 동부구치소 사태에 대해선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인권의 가치가 심각히 훼손됐는데도 그 흔한 유감 표명이 없었다. 선택적 인권, 선택적 침묵의 민낯이다.

박정태 수석논설위원 jtpark@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