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남의 영화몽상] 먼 길 돌아오는 '미나리'

이후남 2021. 1. 12.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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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남 문화디렉터

“1인치 자막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무려 4관왕에 오르면서, 그 중에도 기존에 외국어영화상이라 불리던 ‘국제영화상’을 받으며 한 말이다. 한국영화가, 영어 아닌 한국어 영화가 작품상까지 받다니! 워낙 세계적인 대사건이라 이날 이후 이런 시상식에서 한국어 소감을 듣기는 한동안 힘들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한데 슬그머니 새로운 기대가 생긴다. 한국계 이민자 가족을 그린 미국 영화 ‘미나리’ 덕분이다.

스티븐 연, 한예리, 윤여정 등이 출연한 이 영화는 미국에서 나고 자란 재미교포 리 아이작 정(한국이름 정이삭) 감독이 어린 시절의 자전적 경험을 녹여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한 작품이다. 이미 지난해 초, 독립영화계 최고 축제 선댄스영화제에서 최고상(미국 극영화 부문,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윤여정의 LA비평가협회 여우조연상 등 수상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 아칸소주를 배경으로 한국계 이민자 가족을 그린 재미교포 리 아이작 정 감독의 영화 ‘미나리’. [사진 판시네마]

아카데미상의 전초전 격인 골든글로브상은 아직 후보 발표 전이지만, 대사의 상당 부분이 한국어인 이 영화를 ‘외국어 영화’로 분류해 지난 연말 한 차례 논란을 불렀다. 알다시피 미국은 다인종 사회, 시작부터 이민자가 세운 나라다. 영화감독 룰루 왕은 “‘미나리’는 올해 본 가장 미국적인 영화”라며 “영어구사만으로 미국인을 특징짓는 낡은 규칙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퓰리처상 수상 작가 비엣 타인 응우옌은 워싱턴포스트에 글을 기고해 “과연 무엇이 미국적인 언어냐, 무엇이 미국적인 이야기냐”고 되물으며 골든글로브의 분류를 비판했다.

아직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이런 논란을 보고 있으니 감독의 첫 장편이 떠오른다. 참혹한 내전을 겪은 르완다에서 가족의 복수를 꿈꾸던 소년이 화해에 이르는 여정을 그린 ‘문유랑가보’다. 감독은 아내가 몇 해째 여름이면 자원봉사 활동을 하던 르완다에서, 직업 배우 아닌 르완다 사람들로, 르완다 언어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는 “르완다를 배경으로 외국인 배우가 영어로 연기하는 영화가 아니라 진짜 르완다 영화를 찍고 싶었다”고, “무엇보다 국경(경계)을 넘어서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제작비를 직접 조달한 이 저예산 데뷔작은 단박에 2007년 칸영화제에 초청돼 호평을 받았다. “르완다에서 왜 영화를 찍었냐고 많이들 묻는데, 자연스럽게 찍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국경, 경계 이런 게 예전에는 없었던 시절도 있잖아요. 바꿀 수도 있고, 없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같은 해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가며 감독이 한 말이다.

네 번째 장편인 ‘미나리’로 그는 또 다른 경계와 장벽을 넘어서고 있는 듯 보인다. 수십 년 뿌리내리고 살면서도 종종 이방인 취급을 받는 건 미국의 이민자들만이 아닐 터. 빨라야 올봄쯤이 될 ‘미나리’의 한국 개봉이 기다려진다.

이후남 문화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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