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호주·캐나다 중대재해법 살펴보니, 효과는 "글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외국 사례로 영국이 꼽혔다. 여기에 호주나 캐나다 사례가 거론되기도 했다. 노동계 등에서는 두 국가의 중대재해기업에 대한 처벌 수준을 예시하며 강력한 처벌을 담은 법 제정을 요구했다. 세 나라의 관련 법 시행에 따른 산업재해 감소 효과 등에 대한 분석은 별개였다. 법 제정의 초점은 오롯이 처벌에 맞춰졌다.
사실 산업안전과 관련, 경영진에게 살인죄에 준하는 처벌법을 가진 곳은 영국과 호주, 캐나다 정도다. 나머지 국가는 한국의 산업안전보건법에 명시된 처벌 수준보다 낮다. 그렇다면 세 나라는 법을 시행한 뒤 제대로 효과를 보고 있을까.
◇영국 '법인과실치사법'
사망이 발생한 사고에 대해 법인에 살인죄에 준하는 죄를 묻는다는 취지로 제정됐다. 페리호 전복 사고와 철도 충돌사고로 많은 시민이 숨지면서 이 법의 제정이 본격화했다.
1987년 3월 6일에 영국 도버항과 벨기에 제브뤼헤항 사이를 운행하는 Herald of Free Enterprise호가 제브뤼헤 항을 벗어나자마자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190여 명이 숨졌다. 보조갑판장이 선수문을 미처 닫지 않은 채 항해에 나선 게 사고원인이었다. 이 사건으로 선박 소유주인 P&O 유러피언 페리사와 임원들이 살인죄로 기소됐다. 그러나 91년 무죄로 풀려났다.
97년 9월 19일에는 영국 사우스올에서 스완지와 런던 패딩턴 구간을 운행하던 고속열차가 화물열차와 충돌했다. 7명이 숨지고 100여 명이 다쳤다. 자동경보장치 결함 등으로 기관사가 신호를 제대로 보지 못해 벌어진 사고였다. 그레이트 웨스턴 열차 회사는 살인죄와 작업 중 건강과 안전에 관한 법(한국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그러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에 대해서만 150만 파운드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기업살인법이 논의됐다. 조직의 규모가 커질수록 구성원들의 업무는 분업화한다. 경영진은 거시적인 기업운영이나 의사결정에 개입할 뿐이다. 이 때문에 구성원의 행위로 인해 사망사고가 발생한 경우 살인죄의 고의가 경영진에게 있다고 묻는 데 한계를 노출했다는 자성에서다. 2007년 제정돼 2008년 4월 6일 시행됐다. 이 법은 말 그대로 사망이 발생했을 경우에만 적용된다. 다만 이 법이 제정된 이후에도 산업안전보건법에 의한 처벌을 우선으로 한다.
법 제정 당시 영국 정부의 규제영향평가에서는 "성공적인 기소는 얼마 되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2012년까지 사망사고로 기소된 건수는 104건이었다. 대부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가 적용됐다. 기업살인법으로 유죄가 선고된 것은 3건에 불과했다.
2017년 2월 17일 최초로 기업살인죄가 적용돼 유죄가 선고된 기업이 나왔다. 코스트 월드 지오 테크니컬 홀딩스(CGH)였다. 2008년 9월 지질학자가 작업하다 3.8m 아래 구덩이에서 지반침하가 일어나 질식사했다. 당시 관리자도 없었고, 안전수칙도 지키지 않았다. 법인에 38만5000파운드의 벌금이 선고됐다. 이후 1인 기업이던 농장에 벌금이 내려지는 등 모두 법인에 벌금을 물렸다. 경영 책임자와 같은 개인에 대한 처벌은 없다.
빅토리아 로퍼 영국 노섬브리아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금까지 이 법으로 벌금을 부과받은 기업은 모두 중소기업이었고, 이 중 절반 이상이 파산 내지 영업이 중단됐다. 그러나 사망자 감소 효과는 크지 않았다"고 말했다.
제임스 J 고버트 국립에식스대 법대 교수는 "법인과실치사법은 기업 과실의 독특한 성격과 기업의 성질을 이해하려는 정부의 진지한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고 평가했다. 산업안전에 대한 낙수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다. 일종의 상징적 의미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호주 연방정부에는 없고, 일부 주 정부가 산안법으로 적용
호주는 6개 주와 2개 준주(準州-자치적으로 운영할 수 없어 연방정부의 재정 투입에 의존하는 주)로 이루어진 연방국이다. 연방법이 우선이다. 한데 연방 형법(Crimes Act)과 직업안전보건법(Work Health and Safety Act)에는 중대재해기업 처벌 제도가 없다.
일부 주에서 중대재해법과 유사한 법 운용을 한다. 그러나 중대재해법과 같은 별도 법이 아니라 산업안전법이나 형법을 개정해서 적용한다. 호주수도 준주는 형법(2004년 시행), 퀸즐랜드주·빅토리아주·노던 준주는 각각 산업안전보건법(2017년 시행)에 관련 내용이 있다.
다만 이들 4개 주·준주는 중대재해와 관련, 기업주와 법인을 처벌할 경우 까다로운 범죄 성립 요건을 제시하고 있다. ①심각한 부주의 ②고용한 근로자의 사망에 ③중요한 원인을 제공하였을 경우다. 노던 준주는 이보다 엄격해서 ①안전보건의무를 가진 법인이나 고위 경영진이 ②의도적이고 ③심각한 부주의로 ④안전보건의무를 위반하고 근로자의 사망사고를 유발한 경우로 한정한다. 사실상 안전수칙을 아예 무시하거나 의도적으로 근로자를 숨지게 할 의사가 없었다면 처벌대상이 되기 힘들다.
이 요건을 모두 충족한 사망사고에 대한 형벌은 무겁다. 호주수도 준주와 퀸즐랜드주는 경영자에게 최고 징역 20년, 빅토리아주는 징역 25년, 노던 준주는 무기징역까지 선고할 수 있다. 벌금도 무겁다. 개인 또는 법인에 2억6000만~133억8000만원을 물린다.
◇캐나다 웨스트레이법
캐나다판 중대재해법이다. 92년 웨스트레이 석탄 광산 폭발 사고로 26명의 광부가 숨졌다. 사고 이전에 광부들은 매탄 가스에 의한 폭발 위험에 대해 관리자와 경영진에 여러차례 건의했으나 묵살당했다. 희생자 가족들이 관리자 2명을 살인과 과실치사 혐의로 고발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대재해에 대한 기업과 경영진에 대한 처벌론이 대두했다. 10여 년의 논의 끝에 2004년 웨스트레이법이 제정됐다.
하지만 결과는 초라했다. 법이 시행된 뒤 2014년까지 10년 동안 기소된 건수는 10건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산재 사고에는 한국의 산업안전보건법과 같은 기존의 '직장 안전과 건강 법(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Act)'을 적용하고 있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wol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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