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운 내세요, 고작 펜 한 자루도 버티고 있습니다
[김덕래 기자]
역사와 전통은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로 읽힙니다. 국밥 한 그릇에도 수십 년 세월의 손맛을 이야기하는데, 한 사람의 서사를 온전히 담아내는 도구에 의미를 부여할 이유는 차고 넘칩니다.
순탄하게 살아온 인생이 그저 그 이유로 외면받을 까닭이야 없지만, 곡절을 겪은 누군가의 사연엔 보다 가까이 귀를 갖다 대게 됩니다. 태동의 시기부터 승승장구하며 번창한 회사의, 드러나지 않은 수면 아래 노력을 우리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누군가에겐 마음이 먼저 반응하게 됩니다. '카웨코(KAWECO)'가 바로 그렇습니다.
▲ 세월을 거스른 카웨코(KAWECO)의 Dia 805G EF촉 |
ⓒ 김덕래 |
카웨코는 1883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작은 공장에서 탄생했습니다. 브랜드 탄생 연도는 '만년필의 아버지'로 불리는 워터맨과 같지만, 화려하게 주목받았던 워터맨과는 달리 카웨코는 나름 굴곡 많은 세월을 버텨왔습니다. 1889년 '하인리히 코흐(Heinrich Koch)'와 '루돌프 베버(Rudolph Weber)'가 회사를 인수해 운영하다, 자신들의 이니셜에서 따온 'Koch Weber & co', 즉 'KA WE CO'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통상 만년필의 황금기를 1920~1940년 사이라 하지만, 이 시기 모든 필기구 업체들이 번성했던 건 아닙니다. 볕드는 곳이 있으면, 그늘지는 곳도 있기 마련입니다. 1939년까지 근 10년간 세계경제에 여파를 미쳤던 미국 세계 대공황의 시작인 1929년을 기점으로, 카웨코는 파산과 인수의 시련을 반복하다 1990년대 중반 극적으로 다시 살아나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파카51, 몽블랑149, 펠리칸 M800과 같은 만년필계 불후의 명품 모델을 보유하고 있진 않지만, 카웨코는 자신만의 확실한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두툼하고 묵직하며 고급 재질을 쓴 값비싼 만년필을 만드는 게 아니라, 슬림하고 가벼운 데다 가격대도 합리적이라 늘 한 자루 주머니에 넣어 다니기 용이한 모델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습니다.
요즘 출시되는 모델을 보면 유추하기 쉽지 않지만, 한때 카웨코는 몽블랑, 펠리칸과 같은 형태의 피스톤 필러 충전방식을 채용하고, 펜촉을 자체 생산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피스톤 필러 방식을 버리고, 카트리지&컨버터 혼용 타입만 적용하고 있습니다.
모든 만년필 제조사가 다 닙을 자체 생산하는 건 아닙니다. 되레 손꼽을 만큼 적습니다. 메이저 제조사에 비해 상대적 외형이 작은 업체가 살아남는 방식으로, 업무의 분담화를 택한 거지요. 현재의 카웨코는 닙전문 생산 업체인 '복(Bock)社'로부터 펜촉을 공급받고 있습니다.
▲ 1950년대 말 자체 생산한 카웨코의 펜촉 |
ⓒ 김덕래 |
대부분의 만년필 제조사는 미니 사이즈 만년필을 아예 생산하지 않거나, 만들더라도 일부 라인에 한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카웨코는 초점 자체가 작고 아담한 필기구에 맞춰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펜들이 다 실용성을 강조한 모델인데, 쓸 때의 손맛도 기대 이상이라 작은 사이즈에 먼저 놀라고, 부드러운 필기감에 한번 더 눈을 크게 뜨게 됩니다.
금속으로 된 클립을 분리할 수 있어 수납성이 뛰어난 카웨코 스포츠 라인이 그렇고, 모델명 자체를 '조나단 스위프트(Johnthan Swift)'의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소인국 이름으로 붙인 릴리풋 라인이 그렇습니다. 일반적인 만년필은 캡을 배럴 뒤에 꽂지 않고 쓰는 경우도 많지만, 카웨코 만년필은 몇몇 모델을 제외하곤 대부분 꽂은 상태로 써야 합니다. 그래야만 손에 쥘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과유불급은 만년필에도 적용되는 말
▲ 누군가의 손끝에서 닳고 닳아 뭉툭해진 펜촉 |
ⓒ 김덕래 |
▲ 70년 가까운 세월을 버텨온 메커니즘 |
ⓒ 김덕래 |
▲ 온전한 구석이 없는 만년필 한 자루 |
ⓒ 김덕래 |
빈티지펜이 현행펜보다 까다로운 이유는, 오랜 세월을 지나오며 부속이 삭아버려 분해 중 부서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당연합니다. 막상 힘들게 열었더니, 꼭 부속을 교체해야만 하는 경우도 난감하긴 매한가집니다. 사람으로 치면 노년기에 접어든 펜입니다. 부속을 쉽게 구할 수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입니다.
이 펜은 과거 그 언제쯤 문제가 생겨 누군가 손을 댔다 제대로 살리지 못한 펜입니다. 마치 동면하듯 수십 년 동안 잠들어 있다 다시 깨어난 펜입니다. 부속 구석구석 세척하고, 오일을 바르고, 또 펜촉을 다듬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아무리 귀한 영약을 먹더라도 흰머리가 다시 검어지진 않습니다. 주름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굽은 허리가 절로 펴지는 일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차선책이 있습니다. 원래 상태 대로야 힘들지만, 적어도 몇십 년 세월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만년필을 손보는 일은 어느 면에선 인디언 기우제와 닮아 있습니다. 비가 올 때까지 계속 기도를 그치지 않아 결국 비가 오고야 말게끔 하는 것처럼, 두루 매끈한 상태가 될 때까지 시간이라는 도구를 줄기차게 쓰다 보면 어느 순간 균일한 흐름, 매끄러운 필기감이 손끝에 머물게 됩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나야 할 이유가 명확한 펜 |
ⓒ 김덕래 |
뛰지 못하면 걸으면 되고, 걷기도 수월찮으면 지팡이를 짚으면 됩니다. 삶의 질이 떨어진 건 어디까지나 '불편'이지, '불행'이 아닙니다. 만약 당신의 몸이 지금 불편하더라도, 그것이 젊은 시절을 잘못 살았기 때문이 아니니 자신을 책망하지 마세요.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저 세월 탓입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넓은 의미에서 모든 유기체는 다 생명력이 있고, 생명력이 있는 것들은 다 끝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정해진 수명이 있다손 쳐도, 그날이 오늘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에 호상(好喪)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생명의 스러짐은 다 나름의 연유로 애달프고 서글픕니다. 사람으로 치면 70세 가까운 나이입니다. 고작 펜 한 자루도 이 긴 세월을 버텨왔습니다. 숨쉬는 것이든 멈춰 있는 것이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어떻게든 그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마땅합니다.
* 카웨코(KAWECO)
- 1883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작은 공장에서 시작한 필기구 생산업체. 필기구 강국인 독일 만년필 메이커 중에서 가장 오래된 브랜드. 대표모델로는 1912년 출시해 현재까지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클립 탈부착 방식의 카웨코 스포츠 라인이 있음. 수납성을 강조한, 이른바 '포켓 사이즈 만년필' 제작에 내공이 깊은 필기구 전문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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