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분노를 땔감으로 쓰는 법안 정치

2021. 1. 11.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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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이런 식이다.

여론이 심상찮다고 느낀 정치권은 그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법안 심사에 신속하게 착수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정치권이 사회적 분노를 땔감 삼아 뚝딱 법안을 만들고 "입법했으니 다 됐다"며 사회적 논의가 본격 시작되기도 전에 막아버리는 느낌마저 든다.

아동학대 신고 시 즉각 조사가 이뤄지게 하고, 방해할 경우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처리했다고 "내 자식 내가 알아서 키우겠다는데 당신들이 무슨 상관이냐"며 자식을 소유물 대하듯 하는 부모들이 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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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래 정치부 차장


매번 이런 식이다. 희생자의 안타까운 죽음을 둘러싼 서사가 알려진다. 국민의 분노가 들끓기 시작한다. 악마 같은 가해자를 폭로하는 보도는 성난 민심에 기름을 끼얹는다. 여론이 심상찮다고 느낀 정치권은 그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법안 심사에 신속하게 착수한다. 서둘러 피해자 이름을 붙인 법안을 통과시킨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 했다는 듯, 입법 성과 홍보에 열을 올린다. 그러곤 다시 그들만의 정쟁으로 돌아간다. 분노의 열기가 무색할 정도로, 현장은 달라지지 않는다. 문제 해결 대신 화만 내다 끝나는 무한루프에 빠진 듯하다.

이번엔 ‘정인이법’이다. 왜 그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 모를 아동학대처벌법 개정안이 8일 국회에서 통과됐다. 부모의 체벌 정당화 조항으로 악용됐던 민법 915조의 부모 징계권도 삭제됐다. 최근 추가된 법안도 있지만, 대다수는 지난해 6월 충남 천안에서 양모에 의해 여행용 트렁크에 감금됐다 숨진 9세 아이 사건 직후 발의됐다. 민법 개정안도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대책 마련을 주문하자 법무부가 그해 10월 국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지난해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 논란과 ‘추-윤 갈등’으로 국회 법사위가 여야의 전쟁터가 되면서 방치돼 있다가 이번에 처리된 것이다.

법을 만드는 일은 우리 사회의 공론장에서 토론을 거쳐 문제 해결책을 찾는 길이다. 정치권은 이 과정에서 사회의 낡은 규범을 흔들고,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새로운 가치를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정치권이 사회적 분노를 땔감 삼아 뚝딱 법안을 만들고 “입법했으니 다 됐다”며 사회적 논의가 본격 시작되기도 전에 막아버리는 느낌마저 든다. 아동학대 신고 시 즉각 조사가 이뤄지게 하고, 방해할 경우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처리했다고 “내 자식 내가 알아서 키우겠다는데 당신들이 무슨 상관이냐”며 자식을 소유물 대하듯 하는 부모들이 달라질까.

2015년 9월 아동복지법에 자녀에게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가해선 안 된다’는 조항이 첨가된 데 이어 민법 개정안까지 통과되면서 비로소 한국은 가정 내 체벌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국가가 됐다. 체벌금지법은 아동학대를 막을 근본적 대책으로 추진돼온 것이다. 법무부는 “이번 개정안 통과는 자녀에 대한 체벌과 아동 학대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설마 법안 처리로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길 바란다. 코로나19로 ‘집콕’ 시간이 길어지고, 자녀 양육의 책임과 부담이 어느 때보다 부모에게 오롯이 전가되는 현실에서 반발은 더 커질지 모른다. 부모가 되긴 했지만 어떻게 부모 노릇을 해야 할지 어디서도 배워본 적 없이, 자녀 양육이라는 무한 경쟁 속에 내던져 있는 게 한국 부모들 아니던가.

사랑의 매 없이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은 가정에만, 아이의 부모에게만 맡겨서 될 일이 아니다. 국가가 부모의 자녀 체벌을 금지하는 건, 가정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반드시 막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출이다. 동시에 부모들이 거기까지 가지 않도록 사전에 필요한 지원책을 통해 뒷받침하겠다는 국가와 사회의 약속이 돼야 한다.

문 대통령은 국정과제 53번으로 ‘국가가 책임지는 보육과 교육’이란 전략을 통해 ‘아동 청소년의 안전하고 건강한 성장’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 진정성을 정부와 국회가 법안 통과에 따른 후속 대책과 보완 입법 논의 과정을 통해 입증해주기 바란다. 우리의 분노가 형식적인 입법의 땔감으로 쓰이다 마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

김나래 정치부 차장 nar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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