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숲을 걸으며

홍예진 2021. 1. 1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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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와는 거리를, 자연과는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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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예진 기자]

▲ 과거 농장이었던 숲 집 근처에서 새로 찾아낸 하이킹 코스에서 만난 목가적인 느낌의 나무 다리. 멀지 않은 곳에 작은 폭포가 있고 폭포에서 내려온 물이 실개천이 되어 흐르고 있다. 그 위에 드리워진 소박한 다리.
ⓒ 홍예진
 
예전에는 겨울 숲에 가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을씨년스럽고 무채색인 숲에 무슨 볼거리가 있겠느냐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블레어 위치 프로젝트> 같은 영화 때문에 겨울 숲에 대한 막막한 공포의 잔상까지 겹쳐져 더 그렇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차창 밖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겨울 숲을 볼 때마다 스산한 기분이 들어 계절이 얼른 지나가기만을 바라곤 했다.

코로나19 유행 이후 영화관, 미술관, 공연장, 쇼핑몰에 일절 가보지 못함은 물론이고 벽과 천정이 있는 실내에서 밥을 사먹어 본지도 열 달이 되어 간다. 자연이 없었다면 멀쩡한 정신으로 이 시기를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내 의지가 만들어 낸 건 아니었으나 일상에 공백이 생기고 나서야 나는 본격적으로 주변의 자연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겨우 잔디 관리만 하던 마당에 장미와 수국과 작약을 심었다. 가까운 곳에 있음에도 자주 다가가지 못했던 바다도 원 없이 찾아갔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푸른 물을 눈에 담고 백사장에 몸을 붙였다.

집 근처의 숲에도 틈만 나면 찾아가 누비고 다녔다. 숲은 계절 따라 절기따라 차림새를 달리해서 쉴 틈 없이 나를 매료했다. 겨울 숲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겨울 숲만의 아름다움이 따로 있다는 걸 바이러스로 인한 강제 휴식이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거라고 시절을 위로하며 산책 하나는 열심히 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더니 정말 그렇다. 황량함 속에 웅크린 생명력의 기척이랄까. 그런 것이 겨울 숲의 매력인 것 같다.

숲에 갈 때 더러는 아이들과 더러는 남편과 둘만 간다. 숲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면 오롯이 상대의 말에 집중하게 된다. 남편이 숲 길 한 쪽에 버티고 있는 커다란 바위를 가리킨다. "저 바위에 잔뜩 낀 저 청록색 이끼 같은 것 있잖아. 제프가 그러는데, 저 돌이 그렇게 비싸대." 제프는 남편이 요즘 어울려서 하이킹을 다니는 삼총사 친구들 중 한 사람이다. 남편과 오래 알고 지낸 직장 동료고, 다른 한 사람은 이웃 동네 고등학교 수학 교사인 짐이다.

세 사람은 원래 드문드문 만나 함께 하이킹을 하던 사이들인데 팬데믹 기간이라 갈 데가 없으니 요즘은 매주, 어떤 때는 더 자주 만나서 하이킹을 한다. 두 친구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재담꾼들이다. 지역 내 소식통 역할을 해주는 그들 덕분에 남편이 물고 오는 이야기들이 다채롭다. 남편이 친구들과 하이킹을 다녀오면 나는 남편과 커피를 마시며 그가 업어온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곤 한다.

들어보면 미국 아저씨들의 수다도 여느 아줌마들과 다를 게 없다. 어머니가 트럼프가 하는 말을 믿고 아직까지도 이상한 말을 계셔서 돌아버리겠다는 얘기, 사춘기 딸들 신경질이 도를 넘어 아빠를 밥으로 알고 걸핏하면 펄펄 날뛰어서 최근에는 고속도로를 달리다 내려놓고 올 뻔했다는 얘기, 아내의 고향에서 처가집 식구들이 놀러 와서 뉴욕을 데려가 구경을 시켜줬는데 어찌나 촌티를 내던지 창피해 죽는 줄 알았다는 얘기 등등.

청색 이끼 낀 돌로 조경하는 게 요즘 이 지역 트렌드라는 걸 알려준 사람이 제프였는데, 그가 설명하길 그런 색감의 돌이 뉴잉글랜드라 일컬어지는 미 북동부 지역 사람들이 즐겨 추구하는 고색창연미를 주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이런 돌로 마당을 꾸미면 견적이 훅 올라간다나. 제프가 풀어내는 말에 짐은, 이깟 게 뭐라고 그런데다가 웃돈을 주냐고 뉴잉글랜드 사람들의 별난 취향을 비웃었다는데, 그러자 제프가 발끈하며 퉁을 주었단다.

"넌 롱아일랜드 출신 이탈리아계 촌놈이라서 뉴잉글랜드의 고풍미를 몰라서 그렇지!"

제프를 잘 아는 나는 그 얘기를 듣고 박장대소하고 말았다. 외진 축에 드는 지역이라도 짐의 고향은 뉴욕 근처기라도 하지, 제프야말로 미시간의 벽촌 출신 독일계로 공부를 잘해서 대처로 나오게 된 이른바 '개룡남'이다. 중년이 되어 다들 거기서 거기인 아저씨들이 서로 더 세련됐다고 티격태격하는 게 우스우면서도 귀엽다.

이어 마음 한 귀퉁이가 푸근해져 온다. 이민자로서 혈연, 지연, 학연이 전무한 곳에서 직장 생활을 해오며 외로웠을 남편에게 일상을 넉넉하게 해주는 친구들이 생겼다는 게 기뻐서. 숲길의 차가운 공기 속에다 밭은 숨을 내쉬며 남자들의 수다를 즐거이 풀어내주는 남편. 나의 겨울 숲 앨범 한 페이지에 남편의 경쾌하고도 가벼운 발자국이 찍힌다. 겨울 숲이 더 좋아지는데 유효할 기억의 흔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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