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 봉오동에 터를 닦은 깊은 뜻

김삼웅 2021. 1. 10.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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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1920년 봉오동전투는 무장독립전쟁의 금자탑이다.

 아직 20대 중후반인 최운산 형제들이 천혜의 군사요지인 봉오동에 터를 잡은 것은 선견지명이었는지, 민족주의자 아버지의 조언이 있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최운산은 봉오동을 개척하기 시작하여서부터 주위의 석현, 가야하, 량수, 대감자 일대의 대부분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 일대의 농호는 거개가 최운산의 소작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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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 최운산 형제들은 둔전을 일구면서 양병의 길을 택하였다

[김삼웅 기자]

 
▲ 초모정자산, 산 아래마을이 봉오동 중촌이었다. 초모정자산, 산 아래마을이 봉오동 중촌이었다.
ⓒ 박도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1920년 봉오동전투는 무장독립전쟁의 금자탑이다.

봉오동전투가 있었기에 그해 가을 청산리대첩이 가능했다. 봉오동전투는 국치 이후 우리 독립군이 연대하여 최신식 무장을 하고 일본 정규군과 싸워 대승한 최초의 전쟁이었다. 

전쟁드라마는 몰라도 실제 전쟁에서 우연이나 신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치열한 준비와 훈련, 병사들의 용기와 사기, 지도부의 전술전략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봉오동대첩은 흔히 몇 지휘자의 신출귀몰한 능력에 의한 것으로 기술되지만, 사실 관계는 최운산 형제들의 치밀한 준비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도문시 인민정부가 세운 ‘봉오동 5구구간대주둔지’ 기념비. 봉오동 전적지 가는 길 오른편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 조종안
   
최운산 일족이 봉오동에 정착하게된 과정을 중국 연변대학 교수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1900년대 초까지 이 골짜기에는 인가가 없다가 1908년 연길 사득촌(지금의 신풍일대)에 살던 최명록(최운산)의 지방관청의 인가를 받고 이 골짜기의 토지를 사들여 농군들을 모집해가지고 이 골짜기를 개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조선의 온성, 경원, 경흥 등 지방의 조선인들이 해마다 이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그 절대 다수가 명천사람들이었다.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이곳의 인가가 부쩍 늘어나게 되었고 황씨라는 유식인에 의해 이 골짜기를 봉오동이라 일컫고 사람들은 또 봉오골이라고도 불렀다. 봉오동 골짜기에는 마을 하나만 있은 것이 아니라 골짜기를 따라 마을들이 산재하고 있었는데 하촌, 중촌, 상촌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하촌에는 최명록 일가와 15호 소작농들로 마을을 이루고 있었고 중촌에는 마촌, 박촌, 강촌이 있었는데 80여 호가 살고 있었으며 상촌은 북골(북동)과 남골(남동)로 나누는데 북골에는 32호, 남골에는 28호 도합 60호가 살고 있었다.

상촌은 봉오동골안의 제일 마지막에 위치한 곳이다. 상촌에서 서쪽으로는 석현일대로, 동쪽으로는 비파골일대로, 북쪽으로는 대감자일대로 빠져나갈 수 있는 세갈래의 골짜기가 뻗었다 하여 이곳을 일명 '삼개골'이라고도 하였다. (주석 2)
 
▲ 봉오동 전적기념비 봉오동 전적기념비
ⓒ 박도
 
아직 20대 중후반인 최운산 형제들이 천혜의 군사요지인 봉오동에 터를 잡은 것은 선견지명이었는지, 민족주의자 아버지의 조언이 있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봉오동의 지리적 위치를 살피면, 서남쪽은 가야하를 마주하고 있고 동ㆍ서ㆍ남ㆍ북 3면은 높고 가파른 산으로 둘러싸여서 천연적인 군사요새로는 손색이 없는 곳이다.

최운산은 봉오동을 개척하기 시작하여서부터 주위의 석현, 가야하, 량수, 대감자 일대의 대부분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 일대의 농호는 거개가 최운산의 소작농이었다.

1919년 3ㆍ1운동 이후 자기의 자위단무장을 기초로 반일무장 단체인 대한군무도독부를 건립하고 무기를 사들이고 장정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러므로 봉오동은 독립군기지로서의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었으며 최명록은 독립군부대의 두령이었고 독립군 군비조달에 있어서의 경제적 담보인이였다. (주석 3)

최운산 일가는 연길의 안전한 고장을 떠나 아직은 척박한 봉오동에 땅을 사고 동포들을 이주시키는 등 터를 닦았다. 당시 조선이나 만주에는 많은 땅을 소유한 대지주가 상당수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일제와 타협하거나 예속될 때 최운산 형제들은 둔전을 일구면서 양병의 길을 택하였다.

10여 년 뒤에야 그 의도가 드러났다. 

주석
2> 최홍빈(연변대 교수), 「봉오동전투에 관한  몇 개 문제」, 『룡정 3ㆍ1반일운동』, 257쪽, 연변인민출판사, 1999. 
3> 앞의 책, 2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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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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