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한 방울 안 섞인 아저씨의 사랑.. 진짜 '어른'이란
[이정희 기자]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
꽃다운 어린 생명 하나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분노와 슬픔의 목소리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 그칠 줄 모르는 목소리들의 저변에 깔린 건 '부끄러움'이 아닐까요.
입을 모아 입양한 부모를 질타하고, 입양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하지만, 21세기의 사회에서 여전히 어린 생명이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학대받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사회를 만들었다는 그 '어른된 책임 의식'에서 비롯된 부끄러움 말입니다.
하지만 21세기라는 말이 무색하게 해마다 아동 학대는 늘어가고 있답니다. 2013년 6796명이던 것이 2018년 2만4604건으로 늘었습니다. 2019년에만 43명의 아이들이 '가정 학대'로 숨졌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입양'이 주목을 받고 '가해'를 한 양부모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실제로는 학대 주체의 78.5%가 친부모라는 현실 또한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말하듯 가해 부모들은 대부분 우리 이웃의 평범한 얼굴을 한 사람들입니다. 심지어는 '사랑해서'였다고 말하기도 한답니다(관련 기사 : 변기에 머리를..... 아동 학대 저지른 78.3%에 절망).
여전히 '체벌'을 유일하고도 즉각적인 훈육 방법이라고 배운 부모 세대, 거기에 더해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과 스트레스의 샌드백으로 아이를 여기는 관성, 그리고 보호 기관, 전문 인력과 예산 부족. 사회는 발전되어 가는데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과제들 때문에 학대가 늘어나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1999년 소아암에 걸린 신애 방치 사건으로 아동 학대에 국가가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2013년 이서현양 사건을 계기로 아동 학대에 관한 특례법이 통과되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이번 사건이 단순히 누군가를 벌하는 것에 그쳐선 안 됩니다. 모두가 아동 학대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어른의 자리를 생각하며
▲ 셀레스틴이 알고싶은 사실 |
ⓒ 황금 여우 |
가브리엘 벵상 작가가 쓰고 그린 이 그림책들은 1997년 시공주니어에서 <셀레스틴느> 시리즈 5권으로 출간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 책들은 2015년 황금여우에서 22권의 전집으로 재출간되었습니다. 그중에서 <비오는 날의 소풍>, <크리스마스 파티>, <시메옹을 잃어버렸어요> 등이 많이 읽혔지요. 2012년 프랑스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에서는 2014년 개봉되었습니다.
곰 아저씨 에르네스트와 쥐 어린이 셀레스틴은 가족입니다. 곰과 쥐가 가족이 되다니, 이 이상한 가족의 조합은 '입양'이라는 사회적 관계의 '상징'입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쓰레기통에 버려진 아기 생쥐로부터 시작됩니다. 두 사람이 만나게 된 이야기는 <셀레스틴이 알고 싶은 사실>에서 다뤄집니다. 셀레스틴은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어렵게 말문을 엽니다.
'아저씨가 내 울음 소리를 들어서 다행이예요.'
그저 죽어가는 아기 생쥐를 잘 돌봐주었다는 아저씨 얘기 때문이었을까요? 시리즈의 다른 이야기들을 보면 왜 셀레스틴이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이해가 됩니다.
▲ 시메옹을 잃어버렸어요 |
ⓒ 황금 여우 |
덩치 큰 에르네스트 아저씨는 셀레스틴의 마음을 잘 들여다 봐줍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제일 하기 힘든 게 바로 에르네스트 아저씨와 같은 행동입니다. 있는 그대로 마음을 들여다 봐주기 말입니다.
인형을 잃어버린 곳에도 가주고, 대신할 것들을 찾아주고, 결국 원하는 인형을 만들어 주는 과정은 그 자체로 오랜 벗과 같은 애착 인형을 떠나보낸 셀레스틴의 슬픈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 주는 과정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것, 거기서 '치유'는 시작되는 것이니까요.
'비 안 오는 셈치고 소풍을 가면 어떨까?'
햇빛이 내리쬐는 상상을 하며 집을 나선 두 사람을 만난 곰 아저씨 친구는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이런 날씨에 아이를 데리고 나서다니!'라고 야단을 치지만 비 안 오는 셈치고 나선 두 사람의 소풍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 비오는 날의 소풍 |
ⓒ 황금 여우 |
아이들이 어릴 적 이 에르네스트와 셀레스틴의 이야기를 읽어주면 아이들은 그저 고운 그림과 따스한 이야기라 생각하며 듣고 넘겨 버리지요. 하지만 오히려 책을 읽어주는 어른인 제 마음은 더 찡해졌습니다.
아이의 마음이 상했을 때, 과연 내가 아픈 아이의 마음을 온전히 '수용'해 주었는가?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할 때, 최선을 다해 그 마음을 받아들여주었는가? 남의 눈치나 형편 등을 앞세워 아이를 윽박지르지는 않았는가... 부모의 자리에 대한 반성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에르네스트와 셀레스틴은 말 그대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입니다. 아빠와 딸도 아니고 '아저씨'라고 부르는 사이입니다. 한 사건으로 떠들썩한 요즘이지만, 사실 이 입양이라는 통과 의례를 거친 많은 가족이 에르네스트와 셀레스틴처럼 잘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입양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어른의 자리, 부모의 자리를 망각해서 벌어진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다시 <에르네스트와 셀레스틴> 시리즈를 들춰봅니다. 여전히 부끄러운 마음을 비춰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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