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의 할머니 이름이 '마리아' 된 슬픈 사연
[김종성 기자]
tvN 드라마 <철인왕후>에서 제대로 형상화되지 못하는 철종(김정현 분)의 진면모가 있다. 한두 편의 영화나 소설에 다 담기 힘든 기막힌 가족사로 인해 그가 품고 살았을 내면적 한(恨)은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비극의 대명사' 사도세자가 1762년 임오년에 화를 입은 이래로(임오화변), 사도세자의 또 다른 아들인 은언군의 가족은 오랫동안 우여곡절과 수난을 겪다가 1849년에 손자인 철종이 궁에 들어가 임금이 되는 기적을 맞이했다.
▲ 흥선대원군묘역의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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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신군 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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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언군-전계군-철종이 1771년부터 1849년까지 약 80년간 겪은 우여곡절 내지 수난은 철종의 외형적 생활은 물론이고 내면에도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철종의 내면을 철인왕후와 함께 중점적으로 다루는 드라마에서 제대로 형상화하지 못하는 것은 아쉬운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면의 한이 크다 해서 반드시 얼굴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생의 어디엔가는 흔적을 내기 마련이다. 철종의 삶에 생채기를 냈을 그런 한이 이 드라마에서 명확히 나타나지 않고 있으니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철종 가족의 비극을 다루는 글이나 영상물에서는 이 집안 남성들이 역모사건 등에 휘말려 겪게 된 고난만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은언군, 그 아들인 상계군·풍계군·전계군, 전계군의 아들인 철종이 겪은 일들만 부각되는 경향이 크다.
하지만 이 집안 여성들의 고난도 작지 않았다. 이들이 겪은 것은 정치적 수난뿐만이 아니었다. 이들의 또 다른 수난은 철종의 할머니이자 은언군의 부인인 송씨가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구한말 이후의 여성이라면 모르겠지만, 사도세자의 며느리인 18세기 여성이 이국적 이름을 갖고 있었다는 점은 그의 삶이 순탄치 않았음을 증언하기에 충분하다.
▲ tvN 드라마 <철인왕후>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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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언군 이인(李䄄)은 이복형인 정조 이산보다 2년 늦은 1754년에 태어났다. 만 8세 때 임오화변을 겪은 은언군은 그로부터 5년 뒤인 1767년 13세 나이로 송씨와 혼인했다. 이 결혼에 관한 이야기가 음력으로 영조 43년 7월 11일자(양력 1767년 8월 5일자) <영조실록>에 "왕손 은언군 인(䄄)이 유학(벼슬 없는 선비) 송낙휴의 집에 혼인 들도록 왕명으로 정했다"는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철종의 할머니인 송씨가 마리아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서학(천주교) 신앙 때문이었다. 그런 선택을 한 데는 남편과 아들의 비극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사도세자의 아들이기 때문에, 왕이 되지 못한 왕족이기 때문에 겪는 두 부자의 비극이 송마리아의 신앙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2016년에 <한국사상과 문화> 제84집에 실린 박주 대구가톨릭대 교수의 논문 '조선 후기 왕족 여인 송마리아의 천주교와 가족사 재조명'은 두 부자의 비극을 이렇게 소개한다.
"정조 집권 기간 중에 송마리아의 장자 상계군 담이 홍국영 및 구선복 사건 등과 관련하여 역적으로 지목됨으로 인하여 송마리아와 은언군 가족 전체가 역적의 집안으로 규정되어 강화도로 안치되었다. 이로 인해 송마리아와 은언군이 살던 양제궁을 역적이 사는 궁이라 하여 폐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장남인 상계군 이담은 정조 집권기에 역모죄로 몰려 유폐됐다가 1786년에 목숨을 잃었고, 이로 인해 남편 은언군은 또다시 유배를 가게 됐다. 그 뒤 송마리아는 며느리 신씨와 함께 폐궁에서 쓸쓸한 삶을 보냈다. 며느리 신씨 역시 마리아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33세 나이에 큰아들을 잃고 남편과도 떨어진 송마리아의 가슴 속을 파고든 것은 이국에서 들어온 신앙이었다.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아들과 남편을 잃고 폐궁에서 살고 있던 송마리아와 신마리아의 가슴 속에는 남모르는 한이 맺혀 있었다. 반역을 도모한 집안이라 하여 모든 사람이 방문을 극히 삼가고 있었다.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그곳에 나인 서경의의 외조모인 조씨 노파가 (폐)궁에 들어가 전교하였던 것이다."
양제궁 궁녀의 외할머니한테서 새로운 신앙을 접한 송마리아는 신자들을 자기 궁으로 불러들였을 뿐 아니라 궁녀들의 도움으로 은밀히 출궁해 비밀 미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런 뒤 조선 최초의 외국인 신부인 청나라 주문모(1752~1801)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송마리아 가족은 정치적 탄압을 받기는 했지만, 정조 재위기에는 그런 대로 보호를 받았다. 정조가 조정의 요구를 물리치며 이들을 비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조가 1800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이 일변했다. 정조의 어린 후계자인 순조가 실권을 갖지 못하고 정조의 정적이자 새할머니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대리통치)을 하게 되면서 이 가족은 위험에 빠지게 됐다.
1801년, 관아에 자수한 주문모 신부가 신문을 받는 과정에서 송마리아 고부의 이름들이 등장하고, 주문모가 양제궁에 숨어 지낸 적이 있다는 사실까지 드러났다. 이것은 '송씨를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는 원인이 됐다. 순조 1년 3월 16일자(1801년 4월 28일자) <순조실록>에 따르면,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이들 마리아 고부에 대해 이런 명령을 내렸다.
"강화부에 안치한 죄인 인(䄄)의 처인 송씨, 그 아들 담의 처인 신씨 등의 고부는 사학(邪學)에 함께 빠져 외국인 흉악범과 왕래하고 만나며 국법상 금지의 지엄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함부로 집 안에 숨겼으니, 그 범법을 논하자면 하루도 복재(覆載, 천지)에 용납할 수 없다. 모두 사사하라."
위의 박주 논문에 인용된 달레(Dallet) 신부의 1874년 저작 <한국천주교회사>에 따르면, 이 사사 명령은 적법한 재판이나 신문을 거친 것이 아니었다. 기본적인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송마리아가 사약을 들게 됐던 것이다. 향년 48세였다.
비극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강화도에 있던 남편 은언군도 서학 교도라는 이유로 사사를 당했다. 실제로는 천주교인이 아니었지만 그는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이 가족의 시련은 그 후로도 계속됐다.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장남 상계군과 달리 다른 자녀들은 좀 더 오래 살았지만, 그들의 운명도 평탄치 않았다. 아들 전계군과 손자 철종의 고난이 그 점을 잘 보여준다.
현대 한국인들은 사도세자의 비극을 정조의 비극과만 연관시키고 나머지 자녀들의 비극과는 잘 연관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사도세자의 비극과 은언군의 비극을 분리해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되면 철종의 비극은 은언군-전계군-철종 3대의 비극이 된다.
하지만, 은언군도 사도세자의 아들이고 그의 비극도 아버지와 연결돼 있기 때문에, 철종 가족의 비극은 3대의 비극이 아니라 4대의 비극으로 보아야 한다. 이처럼 대를 이은 비극 속에 송마리아의 수난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수난은 철종의 비극에도 영향을 주었다.
철종 가족의 비극은 사도세자 혈통이기 때문에, 또 왕이 되지 못한 왕족이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천주교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생긴 비극이기도 했다. 그런 복합적인 비극으로 인해 이 가족은 4대째 수난을 겪었다. 이로 인해 철종이 품고 있었을 가슴 속 응어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것이 드라마 <철인왕후>에 좀 더 잘 반영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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