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해됐거나 도망쳤거나.. 그렇게 마을이 사라졌다

변상철 2021. 1. 9.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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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구술, 수상한 섬 수상한 이야기 11] 4.3 사건과 조작 간첩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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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철 기자]

 
 4.3 당시 사라진 마을 중 하나인 곤을동 마을 표지석
ⓒ 한톨
 
제주에서 간첩으로 조작된 피해자들은 육지의 조작간첩 피해자들과 확연히 다른 점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차이 중 하나가 바로 4.3 사건과 조총련이다. 4.3 사건으로 제주에서 살기가 어려워진 도민들이 일본으로 밀항했다. 거기서 만난 친인척들 중에는 조총련계가 많았다. 일본에서 살다가 나중에 제주로 돌아온 이들을 공안당국은 간첩으로 조작했다. 4.3과 조총련은 간첩으로 엮기 좋은 조건이었다. 

제주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일본과 왕래가 잦았다. 이 때문에 새로운 사상과 교육의 영향을 받은 젊은 지식인들이 제주에 다수 유입되었다. 해방이 되자 제주는 새로운 세상 건설을 열망하는 청년들의 뜨거운 열정의 장이 되었다. 해방 직후 올바른 친일청산의 실패를 목격한 청년들은 친일잔재 청산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에 나섰다.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세력과 친일파와의 갈등은 늘 외줄 타듯 아슬아슬했다.

그렇게 외줄을 타던 갈등은 1947년 3.1 만세 운동으로 폭발했다. 3.1 만세 운동 기념식을 마치고 행진하던 시위대가 제주 관덕정을 지날 때 경찰이 발포했고 이 사건은 훗날 씻을 수 없는 아픔의 역사인 4.3 사건으로 이어졌다. 1948년 말에서 1954년까지 발생한 군경의 대대적 토벌작전에서 공식 추산 3만여 명의 도민이 학살되거나 처형당하거나 실종되었다.

제주에서의 조작 간첩 피해는 바로 70여 년 전 남도의 작은 섬에서 발생한 바로 이  대량학살, 즉 제주 4.3과 맞닿아 있었다. 강광보씨가 찾은 곤을동 마을 역시 4.3 사건 당시 학살과 전소, 소개로 지도에서 사라진 제주의 수십 개 마을 가운데 하나다. 곤을동에서 나고 자란 강광보씨는 이곳을 찾아 탁본을 떠서 기억하려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4.3 당시 군경에 의해 모두 파괴된 속칭 '안곤을' 마을. 지금은 집터와 돌담만이 남아있다.
ⓒ 한톨
   
강광보의 구술 = "이 곤을동이 왜 곤을동이냐. 어느 사람에게 들어보니까 옛날에는 여기 물이 흘러 움푹 파여 항상 물이 고여있다 해서 곤을동이라 그러더라고. 그것이 정답인지 모르겠지만. 이쪽으로는 안곤을, 저기는 가운데곤을, 저쪽에는 내가 태어난 바깥곤을이라고 해서 세 마을이 합쳐져서 곤을동이라고 옛날엔 그랬어.

어릴 적에 들은 말인데 4.3 때 왜 여기를 경찰들이 와서 불태웠느냐 하면 그 옛날에 함덕으로 출동하던 경찰차가 저기(곤을동 입구)서 습격을 당했는데 습격당한 경찰 중 한 사람이 살았대. 뒤에 오던 군인들이 그 경찰한테 어디서 습격받았냐니까 이쪽(곤을동)을 가리킨 모양이야. 그래서 그날 와장창 몰려 와서 마을을 완전히 불태워버린 모양이야. 그래 가지고 이제는 흔적만 남아있는 곤을동이 되어 버린 거라.

그 당시에 곤을동 마을은 지역은 작지만 단체의식이 강했던 모양이야. 화북 본동네보다 여기 곤을동 청년들이 상당히 결속력이 강했던 모양이야. 그래서 적극적으로 싸웠던 청년들이 많았는데 그때 4.3 이후로 뿔뿔이 되어가지고 이렇게 터만 남았는데 안타깝지."

곤을동 마을이 있었던 곳에는 주민들이 거주했던 건물의 자리와 건물을 구분했던 돌담만이 남아있어 이곳이 과거에 집들이 들어섰던 자리였음을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마을이 사라지는 동안 수많은 생명도 사라졌다. 육지에서 내려온 군인과 경찰 그리고 서북청년단은 살육을 위해 입도한 괴물들이었다. 그들이 제주도민을 살육했던 이유도 다양했다. 남자라서 죽이고, 청년이라서 죽이고, 남자 없는 집은 산사람 가족이라고 죽이고, 아이들은 또 그 부모의 아이들이라고 죽였다.

그렇게 곤을동 마을은 사라졌고 그렇게 사라진 마을은 스무 곳이 넘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려고 고향을 등지고 도망쳐야 했다. 그날 죽어가던 마을 주민들과 도망치던 생존자를 무심히 바라보던 마을 외소낭(소나무)은 지금도 그 자리에 서서 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강광보의 구술 = "저것(외소낭)은 옛날 그대로 있네. 여름에 덥잖아. 더우면 동네 사람들 나와서 수다 떨고. 여기도 큰길 생기기 전에는 가로등 딱 하나 있어가지고 80년대까지. 내가 태어난 집이 여기라고 하더라. 이 집에서 태어나서 저쪽(화북)으로 가서 4.3 사건 끝나고 나서 외가로 왔어. 그 당시 4.3 때는 집이 하나도 없었거든. 곤을동과 화북 사이가 한 500m인데 집이 하나도 없었어. 이거 다 새로 지은 집. 그래서 마을 이름이 새 동네래."

4.3 학살에 나이와 성별은 없었다. 두 살배기, 네 살배기 아이도, 나이 든 할머니 할아버지, 임산부도 모두 자비 없이 죽어 나갔다. 또 다른 조작 간첩 피해자인 김용담 씨의 아내 김인근의 가족 역시 4.3 평화공원에 위패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특히 2, 4살이었던 조카들도 4.3 당시 학살의 죽음을 피하지 못해 결국 이 수많은 위패 중 하나에 이름을 새기게 되었다.

김인근씨는 조카들 위패 앞에서 조카들과의 추억을 꺼낸다. 김인근씨도 4.3 사건 당시에는 고무줄놀이를 좋아하던 어린아이였지만 조카들을 엎고 돌봐야 하는 처지였다. 엎고 키우던 조카들은 그렇게 군인들의 총칼 앞에 피어보지도 못한 동백꽃처럼 스러져 갔다. 군인 트럭에서 필사적으로 뛰어내려 살아남은 자신이 마치 죄인인 것 같아 조카들 앞에서 사죄하고 또 사죄해야 했다. 
 
 4.3평화공원 내 '제주4.3희생자영위' 에서 가족들의 위패를 찾고 있는 김인근 씨.
ⓒ 한톨
 
김인근의 구술 = "성수야 개똥아. 할머니랑 아버지랑 어머니랑 좋은 극락 세상에서 놀암시라. 아이고 뭐라고 개똥이하고 성수한테 말하면 좋을지 모르켜. 다시 4.3때 와서 성수랑 개똥이 보고 가켜(갈게). 개똥아 울지 마랑. 아버지랑 어머니랑 다 같이 이서이(있어라)... 아이고 나 여기 있는 줄 몰란게.

성수는 차분한 게 고모 말도 잘 들었는데. 네 살 때. 여기는 두 살 때. 울다가도 뚝 하면 안 울고. 성수는 내 등에 업혀서 내가 고무줄 하려고 할 때 울면 울지 말라고 나 고무줄 할 거니까 했는데. 성수야 작은 고모 와서... 성수 보니깐 성수가 찾아온 거 닮다(같다). 성수야. 여기저기서 다 도와줘서 성수 여기 이름 올리게 해 줜(해줘서) 너무 고마워, 진짜 성수야.

개똥아 아버지 어머니 봐 졈지(보고 있지)? 할머니가 너 아껴서 동네 업고 다니면서 자랑한 성수야. 할머니 할아버지 저기 앞 (위패) 잘 봐 졈지? (흐느낀다) 개똥아 갔다가 다음에 온다. 성수랑 개똥이 보러 오지. 일본 고모 할멍 오믄 너 꼭 찾아왕 본다이. 보난 좋다 아이고."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가 사죄를 하는 것이 정의인가? 학살을 기획하고, 자행하고, 반성 없이 권력의 기득권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이곳에서 사죄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정의의 상식 아닌가. 피해자가 위축되고 숨어야 하는 이러한 부정의한 사회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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