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시대다] 가난한 형제를 중심으로 써나가는 성공 서사

2021. 1. 9.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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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MBC 주말드라마 '사랑과 야망'

‘사랑과 야망’은 1987년에 방송된 MBC 주말드라마로, 김수현 작가의 대표작이다. 1958년부터 1980년대까지 고도 성장기에 지방 출신의 가난한 인물들이 각자의 사랑과 야망을 이루어나가는 서사를 유장하게 풀어냈다. 차화연, 남성훈, 이덕화, 김용림, 김청 등의 열연으로, 76%라는 기록적인 시청률을 보였다. 2006년에는 SBS에서 김수현 작가가 직접 쓴 리메이크작이 방송되었는데, 역시 좋은 반응을 거두었다.

지방 출신의 가난한 이들의 성공담
가난한 형제를 중심으로 1958년부터 1980년대를 살아간 인물들의 사랑과 야망을 그린 MBC ‘사랑과 야망’의 장면들. 집안의 기대를 받는 장남 태준(남성훈), 그의 연인인 미자(차화연), 반항적인 차남 태수(이덕화), 그의 진정한 사랑 은환(김청)의 모습(아래 사진). MBC 제공

드라마는 1958년 춘천의 방앗간 집 두 형제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집안의 기대를 받는 장남 태준(남성훈)은 서울의 명문 대학을 다니고, 반항적인 차남 태수(이덕화)는 제대 후 두 달 만에 집에 나타난다. 빚보증을 잘못 선 아버지가 얼어 죽은 뒤, 태수는 빚쟁이를 때리고 도망자가 된다. 나머지 가족들도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향한다. 태준의 연인인 미자(차화연)도 집을 나와 무작정 상경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맨몸으로 상경했지만, 이들은 각자 성공의 서사를 써나간다. 태준은 대기업 최고경영자가 되고, 태수도 건설회사 사장이 된다. 미자는 여배우로 데뷔하여 톱스타가 된다. 태준모(김용림)도 그럴듯한 식당과 부동산을 소유한 부자가 된다. 다리를 약간 절던 막내딸 선희(임예진)은 다리를 고치고 미용사가 되어 태준의 친구이자 의사인 홍조(노주현)와 결혼한다.

모두 성공과 출세를 이루는 셈이니, 오늘날의 눈으로 보자면 어처구니없는 ‘코리안 드림’처럼 보인다. 영화 ‘팔도강산’처럼 체제 홍보용 드라마인가 싶겠지만, 당시에는 위화감을 느끼기보다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유가 뭘까. 첫째는 1980년대 후반에는 가난했던 과거를 거쳐 중산층이 된 사람들이 많았다. 국민소득은 지금보다 훨씬 낮았지만, 자신을 중산층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전 국민의 75%에 이르렀다. 즉 드라마 속 인물들만큼은 아니어도, 나와 내 주변 사람 중에 나름 성공했거나 과거의 땟국을 벗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인물들의 삶의 궤적이 낯설지 않았다. 둘째는 인물에 대한 묘사가 워낙 생생해서, 일방적인 성공담으로만 보이지 않으며, 두꺼운 층위를 지닌 텍스트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고도 성장기의 가족사

이들의 성공이 개연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은 고도 성장기의 한복판을 관통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상경하여 본격적으로 사회에 뛰어드는 시기는 1960년대 초반이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으며, 연 10%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보였다. 태준은 지방 출신 수재로 서울대학을 나와 고시까지 합격했으나 대기업에 취직한다. 일 중독에 가까운 성실함으로 회사에 충성하여 회장에게 실력을 인정받는다. 중간에 좌천을 겪기도 하지만, 회장이 죽자 정유, 화학, 전자, 반도체 계열의 경영권을 물려받는다. 태준의 생애 궤적은 재벌주도하에 중화학공업 위주로 경제성장을 이루었던 산업화시대의 엘리트를 대변한다.

한편 태수는 학력이나 기술 없이 성공을 거둔다. 거친 성격에 주먹깨나 쓰며 건달처럼 떠돌던 그는 친구와 벽돌을 구워 팔다가 건설업에 뛰어든다. 이후 아파트 건설 붐을 타고, 중견 건설회사 사장이 된다. 386세대 이후로는 학력 없이 성공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여기게 되었지만, 이전세대에서 고학력 엘리트는 워낙 소수이다 보니, 학력이 없어도 성공의 기회를 잡는 경우가 많았다. 태수는 강단이 세고 승부욕이 강하며 속임수나 비겁함과 거리가 먼 인물로 그려지는데, 여기에 건설 붐이나 부동산값 폭등 같은 운이 따라 주면서 성공을 이룬다.

야망보다 사랑?

‘사랑과 야망’이 단지 두 형제의 승승장구를 보여주는 드라마였다면 화제작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태준은 당시 출세 지향적인 남성들과 매우 다른 선택을 보여준다. 당시 드라마 속 엘리트 남성은 사회적 성공을 낭만적 사랑보다 우선시했기에, 회장 딸이나 조카와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랑과 야망’에도 그에 해당하는 인물 재은(이휘향)이 등장한다. 태준은 미자와 이혼 후 재은과 재혼을 약속한다. 그러나 미자가 다쳤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간 태준은 미자를 떠날 수 없음을 깨닫고 미자와 재결합한다. 미자와의 재결합은 태준에겐 사표를 내야 할 만큼 중대한 손실이지만, 이를 감수한다.

애초에 미자는 태준모가 극구 반대하는 연인이었다. 남편의 죽음과 관련 있는 ‘원수의 자식’이라는 이유였다. 미자는 태준에게 결별을 고하고 충동적으로 늙은 감독과 결혼했다가 사별한다. 홀어머니가 극구 반대했던 여자와 그것도 여자에겐 재혼이 되어버린 결혼을 강행하겠다는 태준의 고집은 특이한 것이다. 여기에는 어머니에 대한 반항이 깔려있다. 4.19 세대의 사고방식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부모 세대의 낡은 가치관에 맞서고, 낭만적 자유연애의 가치를 지키려는 자존감의 발현처럼 보인다. 하지만 미자와의 결혼생활이 순탄치만은 않다. 결혼 후 태준은 미자의 배우 생활을 그만두게 하고, 자신은 대기업 임원으로 일 중독인 채 살아간다. 미자는 끝없는 고독과 우울 속에 빠져들고, 이들은 계속 불화한다. 오죽하면 엔딩마저 태준의 충성심과 야망을 저울질하며 비웃는 미자에게 태준이 따귀를 갈기는 장면이었으랴.

우울하고 드세고 이상한 여성 주체들

미자는 그때까지 TV 가족극에 등장한 여성 중 가장 자아가 도드라진 캐릭터이다. 그의 욕망은 단순하지 않다. 춘천의 사진관 집 딸로 상경하여 다방 등을 전전하다 톱스타 ‘김미희’가 되고, 감독의 유산으로 부자가 되고, 마침내 첫사랑 태준과 결혼하여 아들도 낳지만, 도무지 행복해지지 않는다. 그는 충족될 수 없는 결핍을 지닌 우울하고 분열적인 주체이다. 미자는 술에 빠져들고 취하면 주정뱅이 아버지를 떠올리며 운다. 그가 여배우라는 점도 전형적이다. 히스테리오닉 인격장애의 특징인 연극적인 성격과 공허한 감정이 두드러진다. 그의 곁에서 정신과 의사 홍조가 지켜보는 것도 심리드라마적 구도를 지닌다. 현모양처가 되거나 남자의 사랑을 받는 것이 여자의 행복이라고 여기던 시절에, 출세나 사랑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우울하고 히스테리적인 여성주체의 내면을 그리다니 굉장한 진보가 아닐 수 없다.
억척스러운 어머니를 연기한 김용림. MBC 제공


태준모도 흔한 어머니상이 아니다. 가장 노릇을 하던 억척스러운 어머니로, 푸근한 모성적 존재와 구별된다. 있으나 마나 하던 남편이 드라마 시작과 함께 죽는다. 이후 ‘부재하는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죄의식으로 남는다. 태준모는 아버지를 너무 몰아세웠다는 아들의 원망과 타지에서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이중의 압박을 받는다. 하지만 태준모는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자식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법도 없으며, 끊임없이 기 싸움을 해댄다. 그의 음식은 자식들의 소울푸드가 아니라 돈이 된다. 함바집을 시작으로 식당으로 돈을 벌고, 번 돈을 ‘땅에 묻어’ 불린다. 산업화시대의 어머니를 무력하고 희생적인 모성이 아니라, 강인하고 생활력이 넘치는 경제주체로 그린 것도 대단히 진취적이다.

정자도 대단히 파격적인 인물이다. 춘천의 부잣집 딸이지만, 태수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한다. 집안 패물을 훔쳐 달아나자 매달리고, 나중에 태수의 아들을 들쳐 엎고 찾아온다. 은환(김청)을 사랑하는 태수와 애정 없는 결혼생활이 계속되자, 그는 남매를 놔두고 집을 나가버린다. 결국 술집으로 흘러들어 못된 기둥서방을 만난다. 정자는 조신하지 못해 팔자를 망쳐버린 여자의 전형일까. 정자와 대비되는 은환이 태수의 아내로 해로하는 것을 보면, 정자가 가부장제의 처벌을 당하는 존재로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정자는 끝까지 순치되지 않으며, 여성의 욕망과 불만을 생생하게 뿜는 불온한 존재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한편 드라마는 비혈연적 여성 연대를 잘 보여준다. 미자의 출세는 혜주(윤여정) 자매와의 인연 덕분이다. 이들은 길바닥에서 부딪힌 미자를 집에 데려와 그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배우로 이끈다. 이후 이들은 미자에게 가족 이상의 존재가 된다. 파주댁(남능미)은 먼저 상경한 태준모를 찾아와 ‘성님’이라 부르며 함께 산다. 리메이크작에서는 태준모가 들인 수양딸 명자(김나운)도 중요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사랑과 야망’은 표면적으로는 고도 성장기에 대조적인 두 형제의 성공담을 그린 드라마로 보인다. 그러나 이면에는 가부장제 가족 로망스의 틈새를 비집고 나온 우울하고 드세고 이상한 여자들과 비혈연적 여성 연대가 생생하게 담겨있다. 시대를 관통하는 드라마이자, 시대를 앞서나간 작품임이 틀림없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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