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난했던 식민지 역사 고스란히 느껴지는 곳, 경포리

조종안 2021. 1. 8.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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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주민들의 삶과 문화, 역사가 느껴지는 흔적들④

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경포(서래포구), 죽성포(째보선창), 옹기전, 공설시장(구시장), 역전새벽시장(도깨비시장), 팔마재쌀시장, 감독(감도가), 약전골목, 농방골목, 모시전 거리, 싸전거리, 객주거리, 주막거리 등이 있었다. 그러나 격동의 세월을 지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지역 주민의 삶과 문화, 역사가 오롯이 느껴지는 흔적들을 기록으로 남겨본다. <기자말>

[조종안 기자]

군산 지역 평야는 20세기 이전부터 농사를 짓던 숙답(묵은 논)과 일제강점기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조성된 신개척답(새 논)으로 나뉜다. 그중 십자뜰, 대야뜰, 수산이곡뜰, 미성뜰, 옥구간척지(어은리, 옥봉리, 선연리) 등은 신개척답 평야이다. 이처럼 일제가 쌀 수탈을 위해 대대적으로 벌인 간척사업으로 군산 지역 해안선은 큰 변화를 겪는다.
 
 1899년경 군산 구암동, 경암동, 중동 해안가 모습
ⓒ 전킨 기념사업회
 
군산 개항(1899) 전후 지금의 구암동산에서 서쪽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다. 전킨 선교사가 찍은 것으로 120년 전 군산 동부지역(구암동, 경암동, 중동, 금암동 등) 모습이라서 귀한 자료로 여겨진다. 길게 누운 월명산 능선과 검은 점으로 나타나는 죽성포(째보선창) 주변 석산, 그리고 해안선이 요즘과 비슷하게 포물선으로 그어져 있어 흥미를 돋운다.

구암동산은 천 리를 흘러온 금강이 잠시 숨을 고르는 위치에 자리한다. 고즈넉한 초가집이 무척 여유롭게 느껴진다. 눈길을 끄는 것은 조선 숙종 27년(1701) 제작된 '전라우도 군산진지도'에 구암동산 지역이 섬으로 표시되고 있다는 거다. 중동, 경암동, 구암동 지역은 100여 년 전에도 간석지였으니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1920년경 지도에서 만나는 군산은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100년의 시간 속에서 해안선 변화가 놀라울 정도인데 그 전 모습은 어땠을까, 상상이 가지 않는다. 1915년 발행된 <군산안내>에 따르면 당시 군산은 서쪽 및 남쪽은 산지로 이뤄져 있고, 지금의 중동, 금암동, 경암동 일대는 갯벌과 갈대밭 지대로 나타난다.

광복 후 크게 달라진 '경포리' 모습
 
 드론으로 찍은 경포천 입구(2020년 촬영)
ⓒ 아이엠군산
 
군산시 중동과 경암동 경계를 이루는 경포천 입구의 최근 모습이다. 1960년대만 해도 멀리 보이는 고층 아파트단지 아래까지 고깃배가 드나들었는데, 좌우를 가로지르는 연안도로(서래교)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행정구역 지도로 구분하면 서래교(경포천) 중심으로 왼쪽은 경암동, 오른쪽 지역에서 연안도로 강변 쪽은 금암동, 내륙 쪽은 중동이다.

조선 시대 서래장터(경포)와 경장시(경장시장)는 경포천을 끼고 열렸다. 두 장시는 400년 역사를 지닌 오일장으로 경포천은 군산의 해상운송 루트였다. 경포(京浦)는 호남지방 물화를 서울로 올려보낸 데서 유래한다. 옥구·임피(군산) 지역의 10여 개 포구 중 서울, 충청, 전라 지역 배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민간인 포구였던 것.

1917년에 제작된 '군산지형도'에 경암동은 용지리(龍池里), 중동·금암동은 경포리(京浦里)로 나온다. 이후 경포리는 경장리(京場里)에 속했다가 1932년 일제에 의해 일출정, 동빈정, 중정, 천조정 등으로 나뉜다. 이때 용지리 일부는 경포정으로 개편된다. 광복 후 일출정과 동빈정은 금암동, 중정과 천조정은 중동에 병합되고, 경포정은 경암동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경포천 주변 지역(금암동, 중동, 경암동 등)은 바닷물이 드나드는 간석지였다. 일제는 1920년 이후 매축공사를 벌여 경마장(헌병·기마경찰 훈련장), 조선소, 목재소, 제염소, 성냥공장 등을 짓고 잔교와 물양장을 갖춘 근대식 어항(째보선창)을 조성한다. 1930년대 초에는 공설운동장(일출운동장)이 개장되고 맞은편에 호남에서 제일 큰 가등정미소가 들어선다.

일본 기마경찰 훈련장, 광복 후 밭으로 개간
 

광복 후, 황목조선소 자리에는 신흥목재(선경목재, 대교합판)가 들어온다. 천조정의 서해조선소는 연안도로 공사 때 폐쇄된다. 성냥공장 자리에는 화력발전소(현 LNG발전소)가 건설된다. 공설운동장은 1980년대 초 주택단지로 변모했으며, 가등정미소는 한국주정, 우풍화학, 한국플라스틱, 한양화학 등 변천을 거듭하다가 지금은 보행공원 조성을 앞두고 있다.
 
 연안도로 완공 전 경포천 입구의 서해조선소
ⓒ 조종안
 벽화그림 뒤편 작은 건물이 샘터경로당
ⓒ 조종안
 
군산경찰서 기마경찰 훈련장이었던 경마장은 광복 후에도 '경마장'으로 불렸으며 주민들의 손으로 각종 농작물을 일궈 먹는 밭으로 개간된다. 중동 샘터경로당 앞에서 만난 배씨 할머니는 "질(길)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경로당 앞에서부터 전부 밭이었다"며 추억담을 들려줬다.

"왜놈들 있을 때는 여기를 '경마장'이라고 혔어. 그러다가 해방 후 사람들이 전부 다 밭으로 맹글었지. 여기 경로당 앞에서 저기 장뚝(강둑)까지 전부 밭이었응게. 여름에는 참외랑 수박이랑 갈아먹고, 가을에는 무, 배차 등을 심어서 시장에 내다 팔기도 허고 집에서 김장도 담가 먹고 그렸지. 그때는 여기저기 원두막도 많았고, 똥통(인분 거름통)도 많았지..."

중동에서 80년 가까이 살면서 구시장(공설시장)에서 생선 장사도 하고 채소 장사도 했었다는 배씨 할머니. 그는 "중동은 땅이 얼매나 질퍽거렸는지 장화 없이는 못 사는 동네였다"며 "옛날에는 고기가 많이 잡혀 방 하나 부엌 하나 있는 집에서 옹색하게 살았어도 재미가 있었는디, 어느 날부터 고기가 잡히지 않으니께 모두 떠나버렸다"고 덧붙였다.

지명(地名) 유래에서 고단한 역사 느껴져
 
 강둑 중심으로 왼쪽은 경마장, 오른쪽은 갈대가 무성했던 갯벌이었다
ⓒ 조종안
 
1950년대, 경포천 입구는 민물과 짠물이 만나는 기수지역으로 봄이면 뱅어, 우어(우여) 등의 어장이 형성됐다. 연안도로 주변 갯벌에는 농게와 참게 구멍이 은하수만큼 많았으며 삼각주에는 '아사리(어른 엄지손톱 크기의 모시조개 새끼)'가 지천이었다. 주민들은 썰물 때 함지박에 가득 잡아 수제비 끓일 때 넣어 먹거나, 삶아서 배고파하는 아이들 허기를 달래줬다.

예전에는 강둑 주변으로 갈대가 무성한 갯벌이 운동장처럼 펼쳐졌다. 사람들은 그 갯벌을 갈대밭, 깔밭, 깔바탕, 뻘탕, 뻘바탕 등으로 불렀다. 일제가 째보선창을 조성하면서 서래장터가 쇠락하자 경포천을 '깨꼬랑(갯고랑)'이라 하였다. 천조정을 '큰동네'라 하였고, 강둑을 따라 조성된 마을을 '짱뚝(장둑)' 혹은 '강가시'라 하였다. 그 외에 안스래, 바깥스래, 시암거리, 밭가운데, 산동네, 피난민촌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향토사를 정리할 때 자료가 빈약할수록 지명 의존도는 높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지명은 땅의 기원과 의미, 변천사 등을 단순화해 보여주는 척도'라는 말이 전해진다. 지명은 곧 역사의 일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터, '경포리' 지역의 복잡하고 지난한 지명 유래와 행정구역 개편에서 고되고 험난했던 일제강점기 역사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다음 기사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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