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판단은 존중하는데.." 더 꼬인 한일관계, 정부 고심 깊어져

유지혜 2021. 1. 8.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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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후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 고 배춘희 할머니를 비롯해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연합뉴스]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8일 법원 판결은 피해자들에게는 사법 정의가 실현됐다는 의미가 있다. 일본은 위안부 피해에 대해선 사죄하면서도 '배상'이란 개념은 끝까지 거부해 왔다. 하지만 꼬일 대로 꼬인 한ㆍ일 관계를 풀어가야 할 정부에는 또 다른 큰 숙제를 안겼다. 일본은 당장 “한국이 국제법을 위반했다”며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日 배상 책임 명시, 피해자 염원 반영
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국제법적으로 통용되는 ‘주권 면제’ 개념을 배척했다. 이는 한 나라의 법원이 다른 나라 정부의 주권 행위에 대해 재판 관할권을 가질 수 없다는 규범인데, 법원은 “주권 면제론은 그 뒤에 숨어 배상과 보상을 회피할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판시했다.

국가가 조직적으로 저지른 반인도범죄인 위안부 피해는 국제법규상 상위에 있는 ‘절대규범(국제 강행규범)’을 위반한 것이라 주권 면제가 적용할 수 없다는 취지다.

일본 외무성은 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1심에서 한국 법원이 위자료 배상 판결을 내린 것에 항의해 남관표 일본 주재 한국대사를 초치했다. 초치가 끝난 뒤 취재진에 답변하는 남 대사. [연합뉴스]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그간 피해자들이 일본과 미국 법원에 제기한 소송에서 모두 패소했는데, 이번에 한국 국내적으로는 구제가 된 것”이라며 “공식 법정에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인정된 것은 처음이라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때 “위안부 문제, 해결 안 돼”
이는 문재인 정부의 철학과도 궤를 같이한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한ㆍ일회담 문서공개 후속 대책 관련 민관 공동위원회는 “반인도범죄인 위안부 피해는 1965년 한ㆍ일 청구권 협정으로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고, 문 대통령은 당시 민정수석으로 위원회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번 소송의 피고가 일본 기업이나 개인 등 민간이 아니라 일본 정부라는 점은 한ㆍ일 관계에 미칠 파장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사법부 판결이란 것은 외교의 영역과 달리 협상이나 대화의 여지가 없다. 상대국 정부를 대상으로 사실상 최후통첩 격의 판결이 나왔으니, 사실 우리 정부가 이에 대해 외교적으로 뭘 해볼 여지는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정부의 재량권은 더 제약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임대사 임명한 날…국면 전환 시도 악재
공교롭게도 판결이 나오기 직전 한ㆍ일 정부는 각각 강창일 주일 한국 대사와 아이보시 고이치(相星孝一) 주한 일본 대사 임명을 공식 발표했다. 양국이 서로 대사 교체를 통해 국면 전환을 꾀하려는 의지를 표명한 직후 사법부 발 충격파가 닥친 격이다.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소녀상. [연합뉴스]

이런 분위기 탓인지 외교부는 판결이 나온 지 6시간 30분이 지나서야 공식 입장을 냈다. "정부는 법원의 판단을 존중한다"면서도 "한일 정부 간 위안부 합의가 양국 정부의 공식 합의라는 점을 상기한다"는 입장에선 쉽사리 다음 수를 둘 수 없는 정부의 깊은 고민이 묻어났다.

여기에 1월 20일이면 미국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한다는 점도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이날 법원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며 “이는 2015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관련 합의의 적용대상에도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2015년 당시 한ㆍ일 간 위안부 합의의 숨은 당사자는 미국이었다. 구체적 합의 내용에 관여한 것은 아니지만, 위안부 문제로 인한 갈등을 매듭짓도록 양국을 독려했다.


바이든, 2015년 합의 당시 관여
특히 당시 합의는 실무진이 아니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나서 관여한 사안이었다. 당시 부통령인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과 국무부 부장관이었던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후보자 역시 상황을 잘 알고 있단 뜻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무력화하면서도 ‘파기’나 ‘재협상’을 선언하지 않은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몰고 올 외교적 파장이 너무 크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2016년 3월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 [청와대 사진기자단]

하지만 이날 판결은 정부를 대신해 사법부가 위안부 합의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나 다름없다. 일본이 배상은 절대 못 한다고 버티는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책임을 통감하고 ▶일본 예산으로 10억엔을 거출해 피해자에게 지원금을 주게 함으로써 한국은 이를 ‘사실상의 배상’으로 받아들일 여지를 준 회색 지대의 합의가 핵심인데, 법원이 이를 정면으로 부정했기 때문이다.


日, 美 상대로 “한국 거짓말쟁이” 역공 우려
이는 일본이 ‘역공’을 펼칠 빌미를 줄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우려다. 한ㆍ일 간 치열한 외교전은 서울이나 도쿄가 아닌 미국 워싱턴에서 벌어진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미국은 위안부 합의를 평가하는 입장이었는데, 이번 판결을 보며 다 끝난 사안을 한국이 또 들고나온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이 이를 이용해 ‘한국은 거짓말하는 나라다. 또 시작하자는 것 아니냐’는 식의 논리를 펼칠 수 있다”고 걱정했다.

실제 일본은 오바마 행정부 때도 ‘골대 이동론’으로 대미 로비를 펼쳤다. ‘수차례 과거사 문제로 사과했는데 한국은 또 사과하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골대를 자꾸 움직이니 갈등이 끝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한 외교 소식통은 “일본은 아예 ‘한국이 미국이 형성한 2차대전 이후 전후 질서를 뿌리부터 흔든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며 “특히 바이든 행정부는 초반부터 대중 압박을 위해 한ㆍ미ㆍ일 안보 공조 강화에 집중할 텐데 한국이 사실상 이를 방해한다는 식으로 공격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유지혜ㆍ박현주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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