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 평가받지 못한 무장독립운동가 최운산 장군
[김삼웅 기자]
▲ 최운산·최진동 형제 |
ⓒ 최성주 |
강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독립투쟁에 나선 애국지사들은 국내외에서 여러 가지 이념과 방략을 제시하고 행동에 나섰다. 시기별로 차이가 있었고 부침이 따랐지만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다.
외교론
실력양성론
무장전쟁론
정부조직론
자치론
복벽론
볼셰비키혁명론
민족혁명론
아나키즘론
이들 중 실력양성론과 자치론이 일제에 투항하거나 협력하는 이데올로기로, 복벽론은 시대역행적인 경향으로 치부되고, 외교론 역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는 일제가 미국ㆍ영국 등과 밀착되고 있어서 무망한 방략으로 인식되었다.
▲ 1922년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할 당시 사진(출처 : 반병률 교수) 최운산 장군(가운데)으로 추정되는 사진 속 인물이 여운형(왼쪽)과 함께 한 사진이다. 이 사진을 입수 발굴한 반병률 교수는 최운산 장군(가운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
ⓒ 반병률 |
독립투쟁의 이념과 방략 중 우선 순위를 매기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가장 어렵고 희생이 많았던 방략이라면 의열투쟁과 무장전쟁이다. 적(일제)과 직접 맞부딪히는, 생명을 내건 투쟁이고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자기희생이 따랐다.
이제까지 우리 독립운동사 연구는 이 같은 인식구조와는 거리가 있었던 것 같다. 큰 조직이나 단체 중심으로 엮어지면서 특히 '무장전쟁'은 후순위로 밀려났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몇 사람 지도자의 영웅담으로 서술되었다. 그래서 독립전쟁에 크게 기여를 하고도 잊혀(묻혀)진 분들이 적지 않았다.
또한 무장전쟁이 거의 중국(만주)과 러시아(연해주) 지역에서 전개되었고, 속성상 홍보ㆍ선전행위보다 직접 행동에 나섬으로써 기록과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았다. 기록과 자료가 없으면 역사에서 사라지기 마련이다. 연구자들은 묻힌 자료(사료)를 찾거나 현장 답사나 증언보다 기존자료를 활용하는 게 훨씬 편하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항일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최운산 장군은 북만주 제1의 거부이자 무장투쟁을 전개한 항일독립투사였다.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키고 빛나는 승리를 전취한 제1의 요인은 수년 간 독립군을 훈련시키고 양성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헌신과 희생의 결실이었다. |
ⓒ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
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역사에 가정이 부질없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가정이 필요할 때가 있다.
천도교가 없었어도 3ㆍ1혁명이 가능했을까? 김구가 없었어도 임시정부 27년이 가능했을까? 김주열이 없어도 4월혁명이? 박종철과 이한열이 없어도 6월항쟁이? 마찬가지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이 없어도 봉오동대첩이 가능했을까? 묻게 된다.
▲ 무장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승리, 청산리대첩을 표현한 ‘청산리전투도’ |
ⓒ 국가보훈처 |
그런데 봉오동ㆍ청산리대첩은 실로 1597년 이순신장군이 12척의 남은 배로 133척의 왜군을 명량해협에서 물리친 이후 323년 만의 쾌거였다. 그래서 대첩이라 불러 손색이 없다.
두 대첩이 있었음으로 하여 한민족은 상무정신을 되살리고, 이후 독립운동의 동력이 되었다. 그래서 봉오ㆍ청산대첩은 민족사의, 독립운동사의 변곡점이 되고도 남는다.
따라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의 막강한 정규군을 격파한 우리 봉오ㆍ청산대첩은 세계전쟁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쉽지 않은 쾌거였다.
▲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를 이끈 네 명의 장군들. 김좌진, 최운산, 김혁, 홍범도. 그 뒤로 평범했던 독립군들이 새겨져 있다. |
ⓒ 김종훈 |
낡은 화승총과 죽창으로 무장한 동학혁명군이 스나이더와 무라타소총 등 현대식 병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무참하게 쓰러진 사력을 갖고 있기에 독립군의 항일전의 사활은 현대식 무기에 있었다. 그래서 최운산 형제들이 거액의 재산을 들여 각종 무기를 사들였다.
최운산 장군은 독립운동의 방략 중 가장 힘든 무장전쟁의 주인공이고 그 역할은 지대했다. 많은 공적이 다른 분들의 치적으로 넘겨지거나 소략된 채 긴 세월 외면과 망각 속에 잊혀졌다.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토스가 처음 사용한 그리스어 Historia는 "진실을 찾아내는 일"이란 뜻이다. 중국의 학자 허신(許愼)은 역사의 사(史)는 "사(事)를 기록하는 사람"으로 풀이했다. 사(史)의 뜻은 "바르게 기록하는 손"의 의미로도 쓰인다.
해방된 조국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무장독립운동가 최운산(催雲山, 1885~1945) 장군과 그 형제들의 치열했던 애국혼과 처절했던 독립전쟁 그리고 서훈신청과 취소 과정에서 빚어진 불미스런 사연을 헤로도토스의 정신으로 탐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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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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