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 칭찬도 모자라.. '아내의 맛' 나경원편이 남긴 쓴맛
[하성태 기자]
▲ 지난 5일 방송된 TV조선 <아내의 맛>의 한 장면 |
ⓒ TV조선 |
"제가 작년 낙선 이후에 특별히 방송 출연이나 정치 활동을 안 했는데 그러다가 너무 국민들과 거리가 멀어진다고 느껴져서 가까워지고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다른 것이 아니라 제가 일을 잘 못하거든요. 밥도 잘 못하고. 그래서 그냥 서투른 모습을 보면 위로가 되시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해봤는데 그림은 엄청 잘하는 것처럼 나왔더라고요." (4일 YTN라디오 <황보선의 출발 새아침>에 출연한 나경원 전 의원)
나경원 전 국민의힘 의원이 밝힌 TV조선 <아내의 맛> 출연 소감이다. 방송 전에 한 인터뷰에서 나 전 의원은 "굉장히 오랜만에 하는 일이라 어색하더라"면서도 긍정적인 분위기의 자평을 남겼다.
어찌 보면 그럴 만했다. 나 전 의원이 출연한 <아내의 맛> 방송분(5일)은 말 그대로 '대박'을 쳤다.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이날 <아내의 맛> 시청률은 전주 방송에 비해 시청률이 두 배가량 치솟으며 프로그램 자체 최고 시청률(11.2%, 비지상파 유료가구 기준)을 경신했다. 분당 최고 시청률은 15.4%였다고 한다.
화제성도 높았다. 예고 기사를 포함, 연예 매체들이 앞다퉈 쏟아낸 기사들이 포털을 장식했다. 이례적인 여성 정치인의 예능 프로그램 출연에 일간지·경제지·통신사 할 것 없이 나 전 의원의 예능 출연을 기사화했다. 대부분 우호적인 평가 일색이었다.
정치인의 예능 출연, 그리고 선거
반면,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은 6일 "예능프로그램이 정치인 선거홍보 방송인가"라며 "TV조선 <아내의 맛>은 선거출마 정치인 출연을 당장 중단하라"는 제목의 논평을 냈다. 나 전 의원에 이어 다음 주 출연을 예고한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역시 석 달 앞으로 다가온 서울시장 보궐시장 출마가 유력시된다는 점에서 여야 동일하게 문제를 제기한 셈이다.
민언련은 "현행법상 보궐선거가 선거일 60일 전에 선거방송심의위원회를 구성하도록 되어 있어 TV조선 <아내의 맛>은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가 유력한 정치인을 섭외하여 출연시켜도 심의대상에 포함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며 무엇이 근본적인 문제인지를 지적하고 있었다.
"시청률을 위해 불과 3개월을 남겨둔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가 유력한 정치인을 섭외한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홍보된 정치인 모습이 선거에 직접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특정 방송사가 예능프로그램을 이용해 일부 정치인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주며 언론이 선거 시기 지켜야 할 중립성조차 위배하고 있는 것이다."
뉴스를 제외하고, 정치인의 TV 출연 시대를 열어젖힌 것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국민의정부를 표방한 만큼, 김 전 대통령은 예능 프로그램 출연도 마다 않았고, 이런 기조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 시기까지 이어졌다.
이후 정치인 TV 출연은 하나의 시대 흐름이 됐고, 시청률과 화제성을 쫓는 방송사의 이해와도 부합되는 결과였다. 그건 비단 대통령에 국한된 사안이 아니었다. 참여정부 당시 보수야당 대표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예능·교양 출연 역시 빈번했고, 해당 프로그램의 시청률을 높인 것이 뉴스가 될 정도였다.
2010년대 들어선 두말하면 잔소리 일 터. 대선주자들이 18대 대선 직전 출연한 SBS <힐링캠프>는 장안의 화제였고, 이후 SBS는 아예 19대 대선에선 <대선주자 국민면접>이란 연성화된 교양 프로그램을 편성하기도 했다. JTBC의 경우, 정치인들이 대거 고정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 <적과의 동침>을 편성할 정도로 진화했다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 전 의원이나 박 장관의 <아내의 맛> 출연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역시나 시점이 관건일 터. 그런데 방송 시점이나 '아내'와 '모성'에 치우친 내용도 문제였지만, 나 전 의원의 경우 촬영 시점 자체가 더 문제적일 수밖에 없었다. 나 전 의원이 1년 반 가까이 피고발인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아왔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 지난 5일 방송된 TV조선 <아내의 맛>의 한 장면 |
ⓒ TV조선 |
<아내의 맛> 제작진은 녹화 당일이 나 전 의원 아들의 입대 이틀 전이라고 밝혔다. 이날 아들은 출연하지 않았지만, 나 전 의원과 남편 김재호 서울고등법원 판사가 아들의 입대를 앞두고 걱정하는 모습이 전파를 탔다.
이외에 나 전 의원이 세안하는 모습부터 다운증후군을 가진 딸과의 일상, 남편 김 판사와의 과거 연애 일화, 친정 아버지인 홍신학원 나채성 이사장과의 한때가 하루 일상으로 담겼다. 여기까진 정치인 가정의 일상일 뿐, 평소 <아내의 맛>의 방송 내용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재차 강조하지만, 관건은 촬영 시점이었다. 김씨는 지난달 21일 입대했다. 나 전 의원이 페이스북에 관련 사진을 올리면서 화제가 됐다. 제작진의 설명대로라면, 촬영은 지난달 19일 진행된 셈이다. 시계를 지난달 그 즈음으로 돌려 보자.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검찰은 나경원 전 의원의 아들 김아무개씨의 입대 전날인 지난달 20일 김씨가 고교 재학 중 국제학술회의 논문 포스터에 제1저자로 이름을 올렸다는 의혹에 대한 수사 결과를 내놨다. '혐의없음' 처분이었다.
다만 김씨의 4저자 등재 관련 혐의는 형사사법공조 결과가 도착할 때까지 시한부 기소중지 처분했고, 군 복무 중 4저자 관련 수사가 재개될 경우 사건을 군검찰로 이송된다는 단서를 달았다.
이후 나흘 뒤인 같은 달 24일, 검찰은 나 전 의원 관련 고발사건을 무더기로 불기소 종결했다. <아내의 맛>에 출연한 나 전 의원의 딸의 성신여대 부정입학 및 스페셜올림픽 조직위원회 비리 의혹 등 14건의 고발 사건에 대해 검찰은 13건을 불기소했고, 1건은 기소중지 처분했다.
물론 검찰의 수사 결과는 논외의 사안이다. 나 전 의원 본인도 시종일관 자신과 자식들의 결백을 주장해왔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물어야 할 것이다.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무더기로 고소당했고 1년 넘게 끌어왔던 나 전 의원의 검찰 조사 결과는 중요치 않았던 걸까. TV조선과 제작진은 다르고 달라야 하지 않았을까.
검찰의 불기소나 혐의 없음 처분 등을 예상하거나 확신했던 게 아니라면, 지난달 19일 촬영을 진행하기 전 나 전 의원의 섭외과정에서부터 별다른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했던 건가. 그러한 국민적 의혹보다 서울시장 출마가 유력시되는 여성 보수 정치인의 출연이 시청률 상승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다면, 그 자체도 문제적이지 않은가.
이미지 메이킹
"정말 낯 뜨겁군요. 서울시장 나가겠다는 여자들은 티비조선 '아내의 맛' 정도는 내야 된다는 겁니까? 시대착오, 전근대적, 공사 구분 안 되고, 여성인격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프로에 나가야 합니까? 선거 92일 전에? 이미지만 있는 여성정치인들을 과연 스마트한 서울시민들이 반길까요?"
7일 열린민주당 김진애 원내대표가 페이스북에 적은 일침이다. 최근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한 김 원내대표는 '아내'와 '모성'을 강조한 <아내의 맛>의 전근대적 시각을 '이미지 메이킹'과 연결지어 비판하고 있었다.
사실 나 전 의원 분량 전체가 그랬다. 전체가 외모와 미모 칭찬으로 점철됐고, 학벌과 판사 출신 부부의 남다른 이력 등 상위층으로서의 면모 간간이 '서민적'인 일부 일상과 부모와 자식으로서의 '보편적' 눈높이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단순한 '이미지 메이킹'인지도 의문이다. 방송 전체가 나 전 의원의 이미지를 순화하고 걸러내는 필터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간 언론이 실명을 감춰왔던 딸과 아들의 출연 자체가 그랬다. 과거 사학비리로 인해 뉴스에 회자되던 홍신학원 나 이사장의 출연도 마찬가지였고.
이번 단발성 출연으로 누가 이득을 봤을까. 두 배의 시청률 상승을 누린 TV조선과 의구스런 시점에 섭외를 수락하고 촬영을 이어가며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한 나 전 의원 양측의 윈윈 게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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