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 따는 노예" 흑인 한 서린 곳, 첫 의원당선 '흙수저 목사'

2021. 1. 7.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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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주 최초 흑인 상원의원이 된 라파엘 워녹. 연합뉴스


6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는 폭력 시위로 얼룩졌지만 조지아주에선 희망의 역사가 쓰여졌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노예로 일하며 인종차별을 겪었던 한 서린 이 곳에서 사상 첫 흑인 상원의원이 탄생하면서다. 주인공은 라파엘 워녹(51)이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을 목사로 살았던 그가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서 현역인 공화당의 켈리 뢰플러를 꺾고 승리했다.

이 지역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를 거둔 건 16년만, 미국 의회에서 흑인 상원의원이 나온 건 11번째다. 지난해 11월 3일 대선과 함께 치러진 상원 선거는 워녹의 승리와 함께 블루 웨이브(파란색이 상징인 민주당이 상하원을 모두 장악하는 것)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뉴욕타임스(NYT)는 5일(현지시간) “라파엘 워녹의 승리는 역사의 일부”라고 보도했다. NYT는 “미국 정치에서 뚜렷한 장벽을 깬 것”이라며 “남부 흑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세대적 돌파이기도 하다”고 평가했다.

젊은 시절 라파엘 워녹과 아버지. [출처 조지아를 위한 워녹 홈페이지]


조지아 주는 미국 흑인 인권 운동 역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 곳이다. 전체 인구 약 1000만명 중 3분의 1이 흑인인데, 대부분 19세기 초 아프리카에서 끌려와 플랜테이션(대규모 농장)에 동원된 노예의 후손이다. 백인 중심 보수 세력과 흑인의 갈등이 여전한 ‘딥 사우스(deep South)’ 중 한 곳으로도 꼽힌다. 선거에선 공화당이 강세를 보여온 지역이다. 이번에도 공화당 후보 측은 워녹이 백인의 특권을 비난하고 낙태를 옹호하는 등 ‘위험한 급진주의자’ 면모를 보인다며 깎아내렸다. 하지만 흑인 유권자들이 대거 투표에 나섰고, 애틀랜타를 중심으로 일자리를 찾아 유입된 젊은 진보 성향의 젊은이들이 워녹 편에 섰다.

워녹의 가정사는 곧 조지아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한 서린 역사의 일부다. 조지아 주 사바나에서 12남매 중 11번째로 태어난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어머니 역시 어린 시절 목화농장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다. 조지아주는 예부터 목화농장이 많았고 노예가 합법이었던 시절, 손으로 일일이 목화를 따내는 고된 작업은 노예들의 몫이었다. 조지아주 흑인 노예들의 한을 그린 영화 '노예 12년'에는 "너는 그래봤자 조지아주 출신의 깜둥이 노예일 뿐이야"라는 목화 농장주의 대사도 등장한다.

영화 '노예 12년'의 한 장면. 목화농장에서 노역하는 흑인 노예들의 인간사를 그렸다. [영화사 공식 스틸컷]


워녹의 부모는 가난했으나 부지런했다. 그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육군에서 복무했는데, 그 과정에서 폐차를 수리기술을 익혔다. 제대 후 조지아주로 돌아와 작은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했다. NYT는 워녹이 성실한 부모 밑에서 자라며 특별한 일이 없더라도 매일 아침 옷을 정갈히 입고 매무새를 다듬는 습관을 익혔다고 전했다.

워녹은 당선소감을 발표하면서도 어머니의 기억을 소환했다. 그는 “(어머니는) 다른 사람의 목화를 따던 82세 된 손으로 며칠 전 투표소에서 막내아들을 미국의 상원의원으로 뽑았다”며 “이것이 바로 미국의 힘”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지지자들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덧붙였다.

목사로 활동하던 시절 라파엘 워녹. [출처 조지아를 위한 워녹 홈페이지]


워녹의 부노는 생업 외에도 목사 안수를 받기도 했다. 부모의 신실함에 영향을 받은 워녹 역시 종교인의 꿈을 키웠다. 고교 졸업 뒤 모어하우스 대학에 진학했는데, 이곳은 흑인 인권 운동의 대부이자 종교 개혁을 이끈 고(故) 마틴 루서 킹 주니어의 모교다. 그는 점차 킹 목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는데, 2005년엔 킹 목사가 목회 활동을 했던 에벤에셀 침례교회에서 최연소 담임목사가 되는 기록도 세웠다. 지난해 7월, 흑인 인권 운동의 ‘마지막 지도자’로 불리던 고(故) 존 루이스 하원의원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 예배를 이곳에서 치렀는데, 당시 추모 설교를 하기도 했다.

조지아 주 상원의원 2석을 차지한 라파엘 워녹과 존 오소프의 모습. 연합뉴스


성경과 교단을 가까이하며 정계와는 거리를 뒀던 워녹이 정치인으로서 주목을 받은 건 2014년이다. 당시 그는 흑인을 포함한 저소득층도 의료비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메디케이드’ 운동의 선봉에 섰다. 정치인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점이다. 2017년부터 지난해 1월까지 유권자 등록과 투표를 독려하는 ‘뉴 조지아 프로젝트’의 의장직을 맡았다.

워녹 뿐 아니라 민주당 존 오소프 후보도 데이비드 퍼듀 공화당 의원을 누르고 승리하면서 조지아 상원의원 2석 모두 민주당에 돌아갔다. 이로써 2009년 오바마 대통령 1기에 이어 12년 만에 블루 웨이브가 실현됐다.

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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