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암 말기 진단.. 12살 인생은 이렇게 바뀌었다
'가족 돌봄'을 말할 때 떠오르는 얼굴들은 '중장년'입니다. 하지만, 분명 한국 사회에도 아픈 부모나 가족을 돌보며 살아가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영국과 일본 등에서는 이들을 지칭하는 '영 케어러(Young Carer)'라는 개념이 있을 정도지만, 한국에서는 그저 '효녀', '효자'로 불릴 뿐 사회적 주체로 가시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난 10여 년간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직접 돌본 조기현 <아빠의 아빠가 됐다> 작가가 자신과 같은 한국의 영 케어러들을 찾아나섭니다. 돌봄이 형벌이 되지 않는 사회를 위해, 더 많은 청년들의 경험담을 기다립니다. (제보 - youngcarer90@gmail.com, jeor23@ohmynews.com) <편집자말>
[조기현, 고정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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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정미 |
모두가 여유롭게 살아가는 것 같았다. 교실에서 웃고 있는 아이들도, 운동장에서 축구하고 있는 친구들도 나무랄 게 없는 생활을 하는 듯했다. 열넷, 이제 막 중학교에 올라와서 맞은 첫 학기에 박희준(가명)씨만 혼자 여유롭지 못했다. 교실 안이 화기애애해지면 걱정거리만 떠올랐고, 운동장에 활력이 넘치면 우울감이 깊어졌다.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이럴 바에 차라리 학교 안 다니고 집에 가서 엄마 보살펴야 되는데, 밥 차려야 하는데, 엄마 아파서 누워 있으면 어떡하지.'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이런 생각을 끊을 수가 없었다. 결국 책상에 엎드려 펑펑 울어버렸다. 어디선가 '쟤 뭐야'라며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희준씨에게는 새로운 학년에 적응하기 위해 써야 하는 에너지가 바닥나 있었다. 엄마가 아프고 나서 변해버린 가족 환경에 적응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었다.
희준씨가 12살이던 2017년, 그의 어머니는 유방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희준씨와의 첫 만남
지난해 10월 한 청소년 독서학교에서 <아빠의 아빠가 됐다>를 주제로 한 북토크를 진행했다. 문답 형식으로 진행한 북토크에서, 중학교 2학년 열다섯 살 아이가 제일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첫 질문자가 바로 희준씨였다.
그는 노인의 빈곤과 고립, 고독사, 1인 가구 증가 등 사회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질문했다. 나는 가족만이 서로 잘 돌보고 돌봄 받는 관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우리 사회가 어떻게 개개인을 지원하고 안전하게 할지를 논의해야 한다고 답했다.
북토크가 끝나고 그는 다시 내게 다가왔다. 사실 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다고, 자신도 엄마가 아프다고, 책 읽으면서 많이 공감했다고. 나는 힘내기를 바란다는, 의례적인 말을 남겼던 것 같다. 북토크 이후 일정 때문에 급하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이후 내내 그 순간이 마음에 머물렀다. 그가 했던 질문과 그가 했을 경험 사이를 상상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경험한 엄마의 아픔과 돌봄을 이제 막 사회적으로 뻗어보려고 시도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번에는 내가 그에게 질문하고 싶었다.
2020년 12월 25일, 그해 마지막 인터뷰를 잡았다. 인터뷰 전 통화에서 희준씨는 작곡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한 동료의 음악 작업 공간을 빌려, 그곳에서 희준씨와 마주했다.
▲ 작곡에 관심이 많은 희준씨를 위해 동료이자 작곡가 Z5ZI의 작업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
ⓒ Z5ZI |
희준씨 어머니는 인테리어 업체 사장이었다. 희준씨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여동생과 함께 엄마가 일하는 현장을 따라다녔다. 현장 작업자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린 후, 다른 현장으로 바쁘게 이동하는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의 아버지도 직업이 있었지만, 가장은 어머니였다. 희준씨가 보기에, 엄마는 일을 힘들어하면서도 좋아했다. 엄마 곁에 있으면, 그가 일하며 느끼는 보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2017년 봄이었다. 마흔일곱살이 되던 해, 희준씨 어머니가 아프기 시작했다. 평소 희준씨의 어머니는 감기 몸살을 앓아도 곧잘 현장에 나갔다. 집에서 희준씨와 동생과 함께 있을 때도 끊임없이 전화로 일을 지시했다. 아파도 잘 쉬지 않았다. 때마침 사업을 확장하려던 시기였다.
하지만 이번엔 몸 상태가 이전과 달랐다. 얼마 후, 병원을 갔다 온 희준씨 어머니는 유방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종양은 전신에 퍼져 있었다. 의사는 암이 뼈에도 있고 뇌에도 있다고 했다. 폐와 신장도 손상됐다고 했다. 희준씨 어머니는 항암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빠지는 머리칼 때문에 아프다는 엄마, 퉁퉁 부은 발에 마사지를 부탁하는 엄마, 모든 일을 접고 집에서 누워 있는 엄마. 12살인 희준씨가 기억하는, '치료받는' 엄마의 모습이다. 어렸던 희준씨는 엄마가 어떤 치료 과정을, 어떻게 거쳤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다만, 아파하던 엄마의 모습들은 여전히 생생하다.
희준씨는 그저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버텼다. 엄마 발의 부기가 빠질 때까지 주물렀고, 동생이 먹을 밥과 반찬을 차렸고, 엄마가 먹을 죽을 쑤었다. 하기 싫은 설거지나 화장실 청소도 곧잘 했다. 그렇게 12살이 다 지나갔다.
변해버린 가족
희준씨 어머니가 치료를 받는 사이, 희준씨 아버지는 보호자 역할을 했고, 인테리어 사업이 망하면서 기울어가는 가세도 붙잡아야 했다. 희준씨 아버지에겐 병원비와 사업 빚을 처리해야 하는 역할이 떨어졌다. 빚을 갚기 위해 집을 팔고, 본업을 하면서도 건설 일용직을 나갔다. 외국인 관광객들을 안내하는 리무진 운전도 했다.
희준씨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딸을 걱정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 어려웠다. 이미 희준씨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업을 하는 동안 10여 년간 희준씨와 동생을 돌봤다. 고령의 나이에 누군가를 더 돌보기엔 벅찼다. 희준씨 어머니가 아프면서 벌어지는 일은 오롯이 4인 가족의 몫이었다. 엄마가 아프고, 아빠가 돈을 벌면, 희준씨가 첫 번째 돌봄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제가 13살 됐을 때부터 아빠가 저하고 엄마한테 막 대하기 시작했어요."
희준씨의 아버지는 어느 순간부터 희준씨 어머니에게 자주 화를 내기 시작했다. 어느 날엔 둘이 병원에 갔는데, 희준씨 아버지가 간호사에게 자신은 희준씨 어머니의 보호자가 아니라고 소리를 질렀다. 병원을 다녀온 어머니가 희준씨에게 이 사실을 털어놨다. 그는 병원비를 달라는 희준씨 어머니에게 눈치를 주기도 하고, 한밤중에 술에 잔뜩 취해 들어오기도 했다. 희준씨 어머니에게 막말하며 상처를 줬다. 어느 날은 희준씨에게 '너는 내 아들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아빠는 계속 엄마랑 싸우고, 집에 나가 있는 상황이니까 저는 '내가 더 많이 역할을 해야겠구나' 책임감을 느꼈어요."
희준씨가 느끼기에, 엄마가 아프기 전에는 아빠와 엄마는 싸우지 않았다. 오히려 화목한 편이었다. 하지만 희준씨 어머니가 아프고 가장이 아버지로 바뀌면서, 희준씨의 가족은 급격하게 뒤집히고 찢어졌다. 그리고 허술하게 다시 합쳐졌다. 모두가 변해버린 가족의 역할에 힘겹게 적응하고 있었다.
아직 이른 죽음
"엄마가 아무 소리 없이 갑자기 누워 있을 때나 아파서 누워 있을 때, 아니면 제가 그냥 자려고 눈을 감으면 갑자기 생각나요. 엄마가 돌아가실 거 같다고 많이 생각하죠, 요즘에도."
처음 희준씨 어머니가 암 판정을 받았을 때, 동생은 암이 정확히 어떤 질병인지 몰랐다. 하지만 희준씨는 죽을 수도 있는 질병이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엄마가 죽는다'고 상상하면 견디기 힘든 슬픔이 밀려왔다. 엄마의 죽음이 바짝 다가와서 희준씨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그런 순간이면 자신이 엄마보다 먼저 죽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견디지 못할 슬픔보다 그게 낫겠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먼저 죽는 게 엄마를 더 아프게 하는 일이라는 걸 안다. 아파하는 엄마의 곁에 있는 자신의 슬픔에 집중했던 지난날과 다르게, 이제는 엄마의 아픔에 더 다가갈 수 있게 됐다.
"나는 계속 건강해지려고 노력해. 건강해 보이려고 노력하고. 그럼 괜찮아질 거야."
최근 희준씨의 어머니는 자신 있게 말했다고 한다. 병원에서는 완치가 불가능하다고 진단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긍정적으로 살면 회복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진다. 그 믿음을 희준씨에게도 전한다. 처음에는 믿지 못하던 희준씨도 엄마가 학부모 모임도 참석하고, 지인들을 만나는 모습을 보며 '절대 안 죽겠구나'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그의 믿음엔 이유가 있다.
희준씨 어머니가 처음 수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희준씨는 열두 번째 생일을 맞았다. 희준씨 어머니는 잠시 병원을 나와서 식당 하나를 빌렸다. 그리고 희준씨에게 친구들을 초대하라고 했다. 친구들이 다 먹고 남을 만큼 풍족하게 치킨을 시켰다. 여전히 링거를 꽂고 있던 엄마의 모습을, 희준씨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아직 그의 삶에도, 엄마의 삶에도 죽음의 자리를 쉽게 내어주고 싶지 않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희준씨가 중학교를 올라간 첫 학기, 반 전체를 대상으로 심리 검사를 한 적이 있다. 질문은 대체로 '우울한가요?', '죽고 싶단 생각이 드나요?' 같은 직설적인 내용이었다. 아무런 감흥 없이 답변을 찍어 '높은 우울감'이라는 결과가 나오는 학생들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희준씨는 달랐다. 하나하나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체크해갔다.
"너구나. 네가 굉장히 높은 점수가 나왔어."
결과지를 보고 그를 부른 상담 선생님의 첫 마디였다. 이후 상담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며 꽉 막힌 도로 같은 마음이 서서히 정리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복잡한 마음을 털어놓을 데가 없었다.
엄마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넉넉하던 살림도 줄었고, 아빠도 폭력적인 사람이 됐다. 아픔과 돌봄의 경험이 자신의 나이에 맞지 않는 경험이라는 괴리감도 들었다. 그런 느낌이 또래들과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학교에서의 상담은 희준씨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됐다. 담임선생님은 그의 마음 상태를 살폈고, 그가 잘하는 것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같은 반 아이들에게 개별적으로 희준이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학교에 적응하는 데 에너지를 쓰기보다 엄마에게 더 집중하고 싶다는 희준씨의 마음도 서서히 열렸다.
2학기가 되니 친구들이 많아졌다. 엄마도 안정됐던 시기였다. 그때 그는 밴드를 만들어 학교 축제에서 퀸의 'We Are The Champions'을 불렀다. 한 번은 일주일 내내 쓴 시나리오를 친구들과 함께 단편영화로 만들기도 했다.
희준씨는 자신이 상담을 하고 나서부터 변화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위 센터(Wee center, 학생생활지원단) 소속 학교 상담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다. 만약 희준씨가 다니는 학교에 위 센터가 없었다면, 그는 지금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래서 희준씨는 전국 모든 학교에 위 센터를 설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작곡가 Z5ZI가 희준씨에게 곡이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지는지 알려주는 모습. |
ⓒ 조기현 |
희준씨는 노인의 빈곤과 고립, 고독사, 1인 가구 증가로 벌어질 문제를 이미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가족은 여전히 4인 핵가족이지만 어머니의 아픔으로 가사와 돌봄의 공백이 생겨났고, 그 공백은 고스란히 희준씨의 몫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12살 때부터 경험했던 아픔과 돌봄의 경험이 단순히 '정상적인' 4인 핵가족에 대한 향수로 귀결되어선 안 된다. 오히려 4인 핵가족 형태로 모든 돌봄을 담당해야 하는 상황 자체를 고민해야 한다.
사람들은 아픔보다 건강이 우선이고, 죽음보다 삶이 더 앞서 있다고 여긴다. 막상 우리의 삶에서 아픔과 건강, 죽음과 삶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경쟁 대상이나 대립 관계가 아니다. 우리는 아무리 건강해지려고 해도 아플 수밖에 없는 몸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건강은 예외적인 상태에 가깝다.
죽음 또한 삶의 한 면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우리가 잘살려고 노력하는 과정은, 잘 죽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을 대립 관계로 보지 않을 때 우리는 삶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고, 곁에 있는 사람의 죽음을 더 잘 애도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희준씨의 바람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어머니의 암이 씻은 듯 사라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만약 그러지 못하다면, 희준씨가 잘 애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세상은 아직 아동, 청소년의 상실과 애도에 큰 관심을 두지 못한다. 어른들도 상실과 애도에 서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픔, 돌봄, 죽음을 중장년이나 노년에만 국한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이가 적든 많든, 우리 모두 잘 헤어져야만 잘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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