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의 문화난장] 민화 갤러리로 변신한 목욕탕

박정호 2021. 1. 7.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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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속의 유머와 해학
한국문화의 바탕이 담겨
100년 전 서민들 희망가
코로나19 시름을 달래줘
박정호 논설위원

예전에 대중목욕탕 건물이었다고 한다. 1층은 여탕이었다. 지금은 미술관으로 쓰고 있다. 미술관 1층 가운데 바닥에 비디오 설치물이 마련됐다. 모양이 길쭉하다. 예전의 욕조 모양을 살렸다. 바가지로 뜨끈한 물을 퍼서 몸에 끼얹던 그 욕조다. 중년층이라면 옛 정경을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비디오 모니터에선 재미난 풍경이 펼쳐진다. 잔잔한 물속에 잉어가 뛰어놀고, 그 물속에 해와 달이 잠겨 있다. 물 위쪽엔 산이 나타나고, 토끼도 등장한다. 우리 민화의 한 종류인 어해도(魚蟹圖)를 영상물로 만들었다. 어해도는 과거를 보거나 결혼을 앞둔 이들의 앞날을 축복하는 선물로 주로 사용됐다.

이 미술관은 지난해 세밑 문을 연 갤러리 조선민화다. 서울 계동 현대사옥 뒤쪽으로 걸어서 5분여 거리에 있다. 10여 년 전부터 불기 시작한 민화 대중화 흐름을 타고 처음 생긴 민화 전문 갤러리다. 서민이 피로를 풀던 대중탕과 민초의 염원이 담긴 민화의 만남, 장소의 상징성이 흥미롭다.

믿음을 상징한 민화 문자도. [사진 갤러리 조선민화]

이곳에는 원래 중앙탕이 있었다. 인근 중앙고 운동부의 샤워실이었다가 1967년 무렵부터 대중목욕탕으로 사용됐다. 동네 어르신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세월의 변화에 밀려 2014년 문을 닫았고, 이후 선글라스 매장으로 쓰였다가 이번에 다시 민화 갤러리로 거듭났다. 시간의 층위가 켜켜이 쌓인 셈이다.

미술관에 들어서면 행복한 세상을 소망했던 옛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3층짜리 갤러리 곳곳에서 실력파 무명 화가들의 피와 땀을 만날 수 있다. 역사에 이름 한 글자 남기지 못했지만 우리만의 독특한 상상력과 색채감, 그리고 공간 구성력을 자랑했던 장인(匠人)들의 합창이다.

부귀를 상징한 모란도. [사진 갤러리 조선민화]

요즘 이곳에선 개관 기념전 ‘디자이너의 민화’가 열리고 있다. 민화에 흠뻑 빠진 그래픽 디자이너 이세영 대표의 소장품을 엄선했다. 이 대표는 “우리 문화의 모태가 민화에 담겨 있다”고 믿는다. “서양 디자인에 경도된 우리 문화계에 새로운 충격을 주고 싶다. 우리 민화의 창의성은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다. 전통 화단에서 홀대받아온 민화의 복권을 꾸준히 펼쳐가겠다”고 다졌다.

민화는 기존의 전통과 규칙을 해체한다. 원근법이 무시되고, 서양 입체파 그림처럼 여러 시점이 겹치고, 과거·현재·미래가 뒤섞인다. 사물의 비례 관계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마치 장난을 치듯 특정 부분을 과장하기 일쑤다. 마음 가는 대로, 붓 가는 대로 그린 것 같은데도 관객의 미소를 끌어내는 유머와 해학이 살아 있다.

이세영 대표

일례로 전시 포스터로 쓰인 ‘믿을 신’(信) 문자도를 보자. 중국 고사에서 언약·믿음의 상징인 청조(靑鳥)와 흰 기러기를 모티브로 삼은 건 기존 양식을 따랐지만 글자 신의 밑의 사각형을 원형으로 과감하게 바꿔놓았다. 단순한 발상 같지만 실제론 대단한 도전이다. 작가의 자신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오랜 내공과 훈련이 뒷받침돼야 한다. 중국에서도 이런 그림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조선 민화는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성행했다. 관념성이 강한 문인화나 산수화와 달리 장수·부귀·다산·출세 등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드러냈다. 경제적으로 성장한 중인·서민들의 예술 욕구를 채워주는 동시에 백척간두에 놓인 시대의 불안을 기지와 웃음으로 달래주었다. 민화 여덟 폭을 붙여 방에 들여놓은 병풍은 당시 민심을 되비춰보는 거울과 같다.

새해 벽두에 민화를 찾아나선 것도 그런 연유 때문에서다. 어지러운 세상을 이겨내는 작은 지혜를 묻고 싶었다. 시대의 어두운 기운을 걷어내는 방편을 옛 그림에서 확인하고 싶었다. 요즘 민화를 즐기는 사람이 늘어난 것도 작용했다. 웬만한 문화센터에 민화 강좌가 개설될 정도다. 미술계에선 민화 인구가 대략 25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100여 년 전과 상황이 유사하다고나 할까. 코로나19로 사회 전반이 그로기 상태지만, 그럴수록 문화에 갈증은 더욱 커질 것이다.

화가 이우환은 민화를 ‘열린 시스템’이라고 표현했다. 민중의 소박한 손길이 담긴, 생활과 예술의 경계가 사라진, 너와 내가 함께 누리는 세상이라는 뜻에서다. 물고기 한 마리, 새 한 마리. 꽃 한 송이에서 희망의 불씨를 찾았던 근대인의 숨결이 지금 우리 곁에 있다. 저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는 불안의 때를 한번 씻어내 보자. 충분하진 않더라도 일단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 문화는, 역사는 그렇게 황소걸음으로 버텨왔다.

박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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