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한 줌의 눈물

2021. 1. 6.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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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드니 가장 쉬웠던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 되는 수가 생겨난다.

삶에는 정답이 있을 수 없고,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것, 그리고 삶은 살수록 요령부득이고, 헤아릴 수 없이 깊고 넓은 것, 그러니 침묵할 수밖에 없다는 것 등이 시인이 생각한 삶의 명제인 것이다.

이러한 전경화 덕분에 우리는 시인이 언어로 그려내고 있는 풍경을 눈앞에서 보듯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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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시인·서울디지털대 교수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 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곽재구 시 ‘사평역에서’ 전문)

나이 드니 가장 쉬웠던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 되는 수가 생겨난다. 그중 하나가 잠을 자는 일이다. 몸을 빠져나간 잠이 천장이나 문지방에서 나를 기웃대는 날이 늘어간다. 어르거나 달래도 어깃장을 부릴 뿐 도통 말을 듣지 않는다. 정신은 은화처럼 또렷해지고 사대육신은 덕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온 생선처럼 딱딱하게 굳어 가는데, 불쑥불쑥 지난날의 과오들이 찾아와 헛살았다, 헛살았다, 염장을 질러댄다. 겨울밤은 깊고 회한의 수심도 깊이를 더해간다. 창 밖 무릎이 시린지 나목들의 시름 소리 우련하게 들려온다. 이럴 때 나는 버릇처럼 시와 음악을 꺼내 읽거나 듣는다. 위 시는 ‘한밤중에 눈이 내리네, 소리도 없이, 가만히 눈감고 귀 기울이면, 까마득히 먼 데서 눈 맞는 소리’로 시작되는 송창식의 노래 ‘밤눈’을 배경음악으로 깔고 읽으면 더욱 운치가 있다.

이 세계는 이성이나 과학으로 사유할 수 없는 분야도 많다. 인간 실존을 둘러싼 문제가 그렇다. 가령, 왜 사는가? 죽음과 탄생, 운명이란 무엇인가? 고독 불안 절망 그리고 그리움과 기다림에는 왜 감기처럼 면역이 없는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사랑과 이별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인가? 선천적이고 항구적인 존재가 아닌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서의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발생시키는 실존 차원의 문제들은 이성과 과학의 영역에서 다루거나 답을 구하기 힘들므로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언어 대신 다른 형식의 언어 즉, 신화나 은유 이미지 상징의 언술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삶에는 정답이 있을 수 없고,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것, 그리고 삶은 살수록 요령부득이고, 헤아릴 수 없이 깊고 넓은 것, 그러니 침묵할 수밖에 없다는 것 등이 시인이 생각한 삶의 명제인 것이다. 삶이 이처럼 웅숭깊음으로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추워서 언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는 이성이나 과학의 바깥에서 생과 삶의 근원을 찾아간다.

대개의 좋은 시편들이 그러하듯이 이 시는 전경화에 성공하고 있다. 전경화란 대상 전체를 묘사하지 않고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 특정 부분만을 전면에 내세우고 나머지는 생략하거나 배경으로 처리하는 기법을 말한다. 위 시는 눈이 내리는 밤 풍경 전체를 대상으로 삼지 않고 시골 간이역 대합실만을 선택해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전경화 덕분에 우리는 시인이 언어로 그려내고 있는 풍경을 눈앞에서 보듯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필립 시드니는 시를 일컬어 “언어로 된 그림”이라 규정하고 있는데 위 시편은 이러한 정의에 잘 부합하고 있다. 늦은 밤 시를 읽다보면 분주해 들끓던 마음이 절로 가라앉는다.

이재무 시인·서울디지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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