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메모리즈⑫] 이준익 감독, 시큰둥 화법의 진정성
10년 전으로 기억한다. 영화 ‘평양성’ 개봉 전, 이준익 감독과 인터뷰차 만났다. 요즘엔 흔히 감독들도 다수의 기자와 공동으로 라운드 인터뷰를 하지만, 당시엔 감독도 배우도 일대일 인터뷰로 진행됐다. 특히나 감독은 사무실에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현재 시점에서 보면 ‘사도’ ‘동주’ ‘박열’ ‘자산어보’ 등의 작품을 통해 역사영화 감독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태동은 한참 전이다. 10년 전 당시에도 ‘왕의 남자’ ‘황산벌’ ‘님은 먼곳에’ ‘구르믈 벗어난 달처럼’ ‘평양성’ 등 지나간 역사를 통해 현재를 바로 보는 경향이 짙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라디오스타’나 ‘즐거운 인생’처럼 아버지 세대의 처진 어깨를 위로하는 영화도 만들고 ‘변산’으로 젊은이들의 힘겨운 청춘을 위로하기도 하지만, 현대사에서 잊을 수 없는 조두순 사건의 상처를 영화로 되돌아보는 일은 감독 이준익이 적격이다. 무게감 있으면서도 감성으로 다가서는, 휴머니즘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엄중하게 문제 제기하는 이준익의 힘을 우리는 ‘소원’을 통해 다시금 확인했다.
이준익 감독은 어쩜 그렇게, 과거든 현재든 어제든 오늘에 관해서든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역사영화에 걸맞게, 적절하면서도 매력 있는 소재를 잘 찾아내는지 늘 궁금하다. 지난해, 종로문화재단이 청년 감독 5인의 단편영화 제작지원을 하고 그 결과를 웹진을 통해 공개하면서 명감독들의 초년시절 또는 조언을 전하고 격려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일련의 과정 종반에 일을 조금 거들었고, 이를 위해 이준익 감독과 통화가 있었다. 청년 감독에게 전하는 조언을 들은 뒤 늘 궁금해 마지않는 질문, 역사영화의 대가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다.
“종종 역사영화 만드니까 제가 역사를 많이 알 거라 생각하시는데, 아니에요. 역사를 영화로 만든다는 것과 역사에 관심이 많고 해박하다는 것은 다른 문제예요. 저는 역사에 무지합니다. 다만 무엇을 모를 때 두 가지 태도가 있어요. ‘알고 싶지 않아’ 외면하는 태도가 있고, ‘알아야겠다’ 궁금증을 갖는 태도가 있습니다. 저는 후자입니다. 궁금증의 신호를 외면하지 말고 따라가다 보면 인물을 만나요, 인물을 접점으로 시대에 대한 이해가 생기면 영화가 되는 겁니다. 그 궁금증의 신호를 외면하지 않으면 됩니다.”
얘기를 들으며, 내색은 안 했지만 사실 깜짝 놀랐다. 10년 전에 같은 질문을 했다는 게 떠올랐고, 듣노라니 그때와 지금의 답이 똑같다. 어떤 테스트 차원에서 반복한 질문이 아니었다. 언제나 과거를 통해 오늘을 해석하는 가슴과 머리를 주는 영화를 연출하고 제작하는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어쩜 그렇게 한국 역사의 특징적 시대와 인물을 찾아 그에 딱 맞는 적절한 접근방식을 보여 주는지 감탄하고 있었기에 나온 질문이었다.
이준익 감독의 화법은 굉장히 지적이고 진지한 동시에 시큰둥하다. 그 시큰둥함을 잘 설명할 자신은 없지만, 인생이란 게 그렇게 간단치 않고 인생이란 게 동전의 앞뒤 면을 다 가진 것인데 내게 왜 답을 단정하라고 하느냐는 반문이 담긴 시니컬이다. 그동안엔 그 시큰둥함에서 ‘반골의 미학’이 전해져 매력과 유머를 느꼈다.
그런데 이번에, 10년이 지나도 똑같은 답을 건네는 이준익 감독의 얘기를 들으며 진정성을 절감했다. 진심이 아니고서야, 내 머릿속에서 이미 정리된 진짜 생각이 아니고서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똑같이 말하는 건 불가능하다.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인생의 본질’이 담긴 이야기를 건네는 어른, 영화의 매무새 그대로다.
이준익 연출, 설경구·변요한 주연의 ‘자산어보’ 개봉을 기다리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준익 감독의 시큰둥 화법, 그 내면의 진심을 듣고 싶어서다. 발화를 통해 또 영화를 통해.
데일리안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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