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라기' 혜린이의 삶을 응원하는 이유

장순심 2021. 1. 5.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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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TV 드라마 <며느라기> 와 영화 <82년생 김지영>

[장순심 기자]

요즘은 드라마보다 넷플릭스를 주로 보지만 어쩌다 포털을 검색하다 보면 카카오TV <며느라기>에 출현하는 박하선 배우 관련 영상이 많이 나온다. 클릭을 부르는 썸네일 때문에 드라마 <며느라기>의 흐름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됐다. 이 드라마에서 내가 매력을 느낀 캐릭터는 큰며느리인 정혜선(백은혜)이었다. 둘째 며느리 민사린(박하선)은 착하지만, 고구마 같은 답답함을 안겨주었다.

큰 며느리인 혜린은 아이를 낳으면 봐주겠다는 시어머니의 말에 단호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힌다. 이미 돌봐 줄 유능한 도우미를 구했다고 말한다.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면 어떡하냐는 말에, 아이는 전적으로 자신이 돌보고 도우미는 자잘한 일을 봐줄 거라고 대답한다. 더불어 직장에 나가기 전까지 아이와 애착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그러기 때문에 자신이 돌보겠다고 말한다. 단호한 의사 표현이지만 부드럽게 돌려 말하는 칼같은 화법이다.

시댁에 제사가 있는 날, 큰며느리 혜린은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다. 제사 준비 등의 모든 일이 동서 사린의 몫이다. 사린과의 전화 통화에서 서운한 감정이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혜린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일로 동서에게 미안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지영(정유미)은 사린과는 또 다르다. 시댁에서 종일 일하고 드디어 친정으로 가려고 준비하는 순간 들이닥친 시누이 내외와 먹을 것을 준비하라는 시댁 식구들 앞에서, 지영은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자신의 생각과 상대의 요구가 충돌했을 때 그녀가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인 것이다.

여성이 느끼는 상실감이나 박탈감이 조건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지영의 고단함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내 어머니의 시간이나 나의 시간이나 82년생 김지영의 시간이나 며느라기 혜린과 사린의 시간을 관통해서 이땅의 여자들이 느끼는 공통된 아픔이나 삶의 피로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이전에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소설적 상황에 대한 이해와 같은 여자라는 유대가 있긴 했지만, 깊게 공감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때문에 영화가 나왔을 때에도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나의 관심과는 상관없이 영화는 개봉되자마자 많은 리뷰와 평점을 통해서 김지영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며 대립했고, 여자대 남자의 구도로 가져가는 것을 보았다. 소모적인 논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본질은 사라진 채 논쟁의 도구로만 남았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

<며느라기>는 소설 <82년생 김지영>에 비해 여성의 입장을 변론하거나 성평등의 관점에서의 논란은 없는 듯하다. <며느라기>가 여성의 삶이라든가 페미니즘 논쟁의 도구가 되지 않은 것은 캐릭터가 지금의 시대를 잘 대변하고, 부부사이의 갈등이나 대립보다는 가족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나 소통에 중점을 두고 다루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이 시달림을 받는 구도가 아닌, 각자의 상황 속에서 나름의 출구를 모색하고 때론 속시원히, 경우에 따라 천천히 변화의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또 인물들의 과거나 내재된 상처를 현재와의 연결고리로 삼지 않는다는 것도 드라마의 장점으로 보였다.

시댁에 가면 며느리 한 사람만 다른 집안의 낯선 이방인이 되어 소외되고 움츠러드는 경험은 나만의 경우는 아닐 것 같다. 그런 와중에 당당히 자신의 의사를 밝히고 쿨하게 퇴장하는 혜린과, 혜린의 생각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맏아들 무구일(조완기)은 마치 요즘 세대의 생각과 가치를 잘 반영하는 것 같다. 부모의 품을 떠나 독립해야 하는 주체로서 부부의 연대와 가족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잘 구현하고 있다고 느꼈다.

가끔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한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많은 자식들과 시부모님, 남편의 형제들까지 건사해야 했던 그 삶을 되짚어보면 경탄이 나오다가도 한탄이 나온다. 어떻게 그렇게 사실 수 있었을까 놀랍다가도 왜 그렇게 살았는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삶을 살피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회한도 크다.

돌아보니 그 시대의 어머니는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할 시간조차 없었다. '나'가 없는 삶. 한 순간도 가족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삶. 자식들과 식솔들 입에 무엇이라도 넣기 위해 현실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했던 삶이었다.

삶은 수레바퀴처럼 굴러가는 것이었고, 종일 노동에 하루를 묻고 살지 않으면 나사가 풀리고 바퀴는 수레에서 빠져버리는 형국이었다. 삐걱거리고 덜거덕거려도 그저 굴러가게만 하려고 매일 안간힘을 쓰며 노력했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긴 고통의 시간에 비해 노년의 쉼은 너무 짧았다. 

지금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독단적이고 강력한 카리스마가 칭찬받는 시대는 아니다. 더불어 혼자만의 활약으로 극적 성취를 이루어 내는 상황에 열광하지도 않는 것 같다. 한 인간으로서 일상에서의 성취가 불평등과 불합리의 문제를 진솔하게 털어놓고 모두가 같이 생각할 수 있게 한다면, 누구나 공감하고 인정하는 세상인 것 같다.
  
사회적 지위의 상승과 욕망의 충족이 삶의 전부가 되는 세상도 아니다. 그것이 여성 혹은 남성이라고 해서 모두가 칭송하지도 않는다. 성을 넘어 한 사람, 하나의 주체로서 어떻게 삶을 일구는지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이해되는 서사에 모두가 주목하는 것 같다. 성적 불평등을 가지고 반목하고 대립하는 문제는 시대의 화두에서 벗어나야할 것 같다.

곧 60이 되는 나는 아이들의 장래도 생각해 본다. 더불어 어떤 친정엄마 혹은 시어머니의 모습으로 살아갈지도 생각한다. 나는 <며느라기>의 시어머니처럼 가족을 위해 온통 희생하는 어머니는 아니다. 흔히 말하는 '라떼'를 강조하는 사람도 아니고 '꼰대'의 마인드로 무장된 사람도 아니다. 내가 어설프니 상대의 완벽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아들의 부엌일도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는 것처럼 아낌없이 칭찬한다. 더불어 아이들이 결혼해도 나는 '나'로 살아가고 싶다.

'과거가 현재를 정의할 수 없다'는 말을 나는 긍정한다. 자라온 환경이, 시대적 사고와 가치관이 여성에게 억압이 되고 남성에게 자부심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드라마가 그것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이왕 재미있게 본 드라마가, 여성과 남성의 역할에 억지를 쓰지 않고, 극단적으로 과장하지도 않는다면, 재방, 삼방을 통해서라도 <며느라기>의 열혈 시청자임을 증명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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