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칼 뽑은 이낙연, 퇴로는 없다
사면론 앞세워 색깔 드러낸 이낙연
'역풍 속 정치력 보일까' 시험대 서
여의도 정치권에서 묘소 참배 논쟁이 일던 때가 있었다. 5년 전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을 이끌던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이 2015년 1월 새해 첫 당무로 국립현충원을 방문해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만 참배하고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는 건너뛰었다. 찬반양론이 갈렸다.
그해 2월 8일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에서 대표직에 선출된 문재인 대통령은 ‘달라진 문재인’을 예고했다. “묘소 참배 여부로 국론이 나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참배로 갈등을 끝내겠다”고 했다. 그는 대표직 첫 일정으로 2월 9일 김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뒤 공언대로 이·박 전 대통령 묘소도 찾았다.
문 대통령 자신도 2012년 대선 민주통합당 후보로 선출됐을 때는 김 전 대통령 묘소만 찾았었다. 그만큼 파격이었다. 새정치민주연합 내부 분위기는 싸늘했다. 지금은 대표적 친문으로 불리는 정청래 민주당 의원도 당시엔 “가해자들이 용서를 구하지 않은 마당에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17년 4월 3일.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로 뽑힌 뒤의 문 대통령 행보도 ‘통합’으로 시작했다. 4월 4일 대선 후보 첫 공식 일정으로 다시 현충원을 찾은 문 대통령은 이승만→박정희→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 등 서거 순서대로 참배했다. 강성 지지층의 반발은 이때도 컸다. 당원들 사이에서 “정말 실망했다” “그런다고 수구세력들이 달리 보겠는가” 등 거친 공격이 쏟아졌다.
2015년 2월과 2017년 4월 일을 떠올린 건 새해 벽두 정치권을 뒤흔든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특별사면론 때문이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가 1일 공론화했다가 이틀 만에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브레이크가 걸렸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카드로 보인다.
문 대통령이 두 전직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5년 전과 이 대표가 사면론을 꺼내 든 지금은 물론 다르다. 하지만 대선이 가까워진 시점에, 지지층 반발을 무릅쓰고, 중도층을 겨냥한 외연 확대 차원의 통합론을 제시한 메시지란 점에서 둘은 비슷하다. 어쩌면 진보·보수 양쪽 진영 안에서조차 찬반이 첨예하게 갈리는 전직 대통령 사면론은 폭발력이 훨씬 큰 이슈다. 여기에 이 대표가 불을 댕긴 거다. 한때 40%를 넘나들던 차기 대선 주자 지지율이 20% 아래로 추락한 상황, ‘어대낙(어차피 대통령 후보는 이낙연)’보다 ‘추풍낙연’에 가까워지는 듯한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이 대표로선 칼을 뽑은 셈이다. 승부수는 묘수가 될까, 자충수가 될까.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이 성립하려면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우선 형식적 요건으로, 특별사면은 법원 형 확정이 전제다. 지난해 5월 당시 문희상 국회의장이 퇴임 기자간담회에서 “사면을 겁내지 않아도 될 시점이 됐다”고 했을 때 청와대가 선을 분명하게 그은 근거도 “형이 아직 확정되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대법원 상고심에서 17년형이 확정된 이명박 전 대통령에 이어 박근혜 전 대통령 사건이 오는 14일 대법원 재상고심에서 최종 확정되면 절차적 걸림돌은 없어진다.
여기에 내용적 요건이랄 수 있는 국민 여론이 모아져야 한다.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성 당원들의 역풍 속에 3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리한 기조는 “국민 공감대와 당사자들의 반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국민 공감대’는 조만간 발표될 것으로 보이는 사면 찬반 여론조사를 통해 보면 어느 정도 가늠될 것이다.
열쇠는 결국 고유의 사면 권한을 쥔 대통령의 결심에 달렸다. 시선은 14일 박 전 대통령 재상고심 직후로 예상되는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에 모아진다. “당사자 반성”을 전제로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고 “시기상조”를 이유로 논의에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다. 문 대통령이 2015년 2월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뒤 한 말은 “역사의 가해자가 잘못에 대해 반성하고 피해자가 용서할 때 진정한 통합이 이뤄진다” 였다.
묘수와 악수 사이에 놓인 이 대표는 스스로 본격 시험대에 올랐다. 2012년 대선 후보 때 이·전 대통령 묘소 참배를 건너뛰었다가 2015년 당 대표가 되고선 변화를 택했던 문 대통령처럼 말이다. 이 대표가 ‘통합’ 깃발을 든 건 제 색깔을 드러내고 정치적 시험대에 자신을 올리겠다는 의미다. 이 대표 주변에선 “사면론 다음으로 국민 통합을 염두에 둔 후속 카드가 이어질 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하지만 사면 카드에서부터 견고하지 못한 당내 기반의 실체가 드러난 셈이 됐다. 이 대표는 앞으로 어떤 정치력을 보여줄까. 당장 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응답’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김형구 정치에디터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 文 '탈정치' 선언 검토...정치는 여의도에 맡긴다
- "췌장 절단, 교통사고 당한 수준" 의료진이 본 정인이의 마지막
- "연예인처럼 살지말라" 현각 스님의 '현각 쇼' 고백
- 토론 나온 진중권 "秋 폭주하도록 문 대통령이 방관한 것"
- "직접 천 마스크 만들어 썼다"...이렇게 살아난 광주교도소
- 커지는 황운하 6인 식사 논란..."출입자 명부도 제대로 안적어"
- ‘정인이 학대’ 뭉갠 양천경찰서, 서장은 전 경찰개혁TF 팀장
- 할머니에 ‘2초 퇴짜’ 당한 해리왕자, 팟캐스트가 독립 돌파구?
- "칭화대생 것은 7000만원" 대놓고 난자 파는 中대리임신 회사
- 인구감소 시대, 공무원 12만명 늘린 文정부...MB때의 18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