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빠삐용의 독백 '나는 유죄입니다'
삶, 의미 있는 순간의 시간적 배열
값진 시간으로의 변환은 개인 몫
사막 한가운데 발자국을 남기며 한 남자가 걸어가고 있다. 신기루인 양 저 멀리에 붉은 옷을 입은 재판장과 그 양 옆에 배석한 12명의 부심이 보인다. 천천히 다가오는 사내를 향해 재판장이 큰소리로 외친다.
“네 죄를 네가 알리라.” 그 사내는 당당히 외친다. “나는 죄가 없습니다. 나는 그 포주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대화가 이어진다. “그렇다. 너의 죄는 그 포주의 죽음과 관계없다.” “그렇다면 나의 죄는 무엇입니까?” “너의 죄는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죄이다. 나는 너를 ‘삶을 낭비한 죄’로 기소한다.” 사내는 재판장을 향해 당당히 걸어가던 발걸음을 멈춘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회한에 가득한 목소리로 힘없이 이렇게 읊조린다. “유죄(를 인정합니다)….” “네 죄에 대한 벌은 사형”이라는 재판장의 준엄한 선고를 뒤로하고 사막 한가운데로 쓸쓸히 되돌아가며 사내는 몇 번이고 되뇐다. “유죄…, 유죄…, 유죄….”
프랭클린 샤프너(1920~1989) 감독의 영화 ‘빠삐용’(1973)에서 교도관의 학대와 굶주림에 지쳐 독방에 쓰러져 있는 빠삐용(스티브 맥퀸, 1930~1980)이 환영 속에서 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제2대 왕 다윗이 지은 시 한 구절을 마르틴 루터(1483~1546)는 이렇게 번역했다. ‘내 시간은 당신의 두 손 위에 있으니’(시편 31:15). 이 구절의 ‘내 시간’을 후에 다른 이들이 ‘내 생명’ ‘내 앞날’ ‘내 일생’ ‘내 운명’ ‘내 앞에 벌어질 일’ 등으로 번역한 것을 보면 ‘시간’이 곧 ‘삶’이라는 인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한가 보다. 그러니 빠삐용이 낭비한 것은 다름 아닌 시간이다.
음악을 시간적 예술이라 하는 것은 단지 음악을 연주하고 감상하는 데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리적 시간을 음악적 사건과 그 상호관계를 통해 음악적 시간으로 변환한 것이 음악이라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음악과 삶은 참으로 많이 닮았다. 시간적 경과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음악적 사건의 특징과 그 관계가 그 음악을 규정하듯이 우리가 행하고 겪는 모든 일이 곧 삶이니까.
‘조직된 소리의 시간적 배열’(아도르노, 1903~1969)이라는 음악의 정의에 삶을 대입해 보면, 삶은 ‘의미 있는 순간의 시간적 배열’이다. 물리적 시간 개념상 구현 불가능한 다양한 시간적 왜곡이 음악 속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실상 이것이 음악의 본질적 속성이다. 시간적 질서(박자)로부터 일탈할 수도, 빠르기를 바꿀 수도, 일시적으로 멈출 수도(늘임표), 심지어 예시나 회상을 통해 이전과 이후를 넘나들 수도 있다. 이렇게 음악적 시간은 상대적이고 그래서 음의 길이는 몇 분의 몇 초라는 절대적 길이가 아니라 몇 분의 몇 음표라는 상대적 길이로 표기한다.
이를 통해 구현되는 음악의 시간적 상대성은 여유로움, 급함, 지루함, 초조함, 기대, 당혹스러움, 회상, 환희 등 감상자의 심상에 다양한 정서적 변화를 일으킨다. 그래서 우리가 음악을 들으며 느끼는 지루함이나 벅찬 감동은 길이나 규모가 아니라 그 음악의 시간적 구조, 간단히 말해 어떤 음악적 사건이 ‘어느 시점에’ ‘왜’ ‘어떻게’ 벌어졌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민 갑부’(채널A), ‘유퀴즈 온 더 블럭’(tvN), ‘생활의 달인’(SBS), ‘인간극장’(KBS) 등 평범한 우리네 이웃의 이야기를 접하며 박수를 보내고, 감탄하고, 응원하고, 때로 눈물짓는 것은 그들이 성취한 ‘무엇’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삶을 물리적 시간으로 방치할지 값진 시간으로 변환할지 그 선택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라는 웅변에 대한 공감의 표출이다.
‘인생은 짧고 아르스(Ars, 예술과 기술)는 길다. 기회는 쉽게 사라지고, 실험은 위험하고, 결정은 어렵다.’ 히포크라테스(B.C. c. 460 ~ c. 370)의 한탄(?)이다. 의술을 연구하고 다 익히기에 삶이 너무 짧으니 이를 축적·전승하는데 힘쓰라는 뜻인지, 비록 생전에 다 이루지 못할지라도 후대에 열매 맺을 초석을 닦으라는 뜻인지, 자신은 죽을지라도 의술은 영원히 남아 병든 이의 희망이 될 것이라는 뜻인지 단정할 수 없지만, 낭비해도 좋을 만큼 시간이 많지 않음을 강조한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삶을 낭비하는 인물의 전형 둘을 제자들에게 비유로 제시한다. 값없이 받은 재화(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악하고 게으른 종’과 아버지께 떼를 써 미리 상속받은 재산을 탕진한 ‘탕자’가 바로 그들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낭비고 옳지 않은 일을 해도 낭비다.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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