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복주머니가 사라졌다
그 어느 때보다 복이 필요한 새해인데, ‘복주머니’가 사라졌다! 신년 초 백화점과 상점 앞에 늘어서 있는 복주머니, 일본어로 ‘후쿠부쿠로(福袋)’는 좋아하는 풍경 중 하나였다.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른 채 사들고 와, 그 안에 담긴 물건으로 한 해의 운을 점쳐보는 재미. 유명 백화점의 복주머니에는 구입가격을 훌쩍 넘는 물건이 들어있어 사람들이 이걸 사려고 몇 시간씩 줄을 서곤 했다. 개점과 동시에 전속력으로 달려 들어가 복주머니 쟁탈전을 벌이는 사람들을 보면, 평소 욕망을 꽁꽁 감추고 사는 듯한 일본인들도 ‘역시 같은 인간이었군’하며 묘한 안도가 느껴졌다.
올해 일본에서 복주머니가 사라진 건 당연히 코로나19 탓이다. 사람이 모이는 걸 피하기 위해 대부분의 점포가 복주머니를 아예 없애거나 온라인 판매로 대체했다. 연초 찾아간 백화점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오갔지만 예전 같은 활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기분 탓인지, 다들 조금 지쳐 보였다.
한편엔 느닷없이 삶의 경계에 서게 된 사람들이 있었다. 3일 도쿄 치요다구에 있는 성이그나시오 성당. 코로나19로 직장을 잃고, 집을 잃고, 빈곤 상황에 처한 된 이들을 위한 상담소가 마련됐다. 일본 내 40여개 사회단체가 참여한 ‘코로나재해긴급액션’이 준비한 자리다. 이날 낮 12시에서 4시까지 300여 명이 다녀갔다고 했다.
30대쯤 되어 보이는 한 남자가 법률 상담을 위해 찾아왔다. “코로나로 직장을 잃고 월세를 못 내 쫓겨났다고 합니다. 지금은 도쿄도가 운영하는 임시숙소에 거주하고 있고요.” 상담을 마친 변호사가 대신 사정을 말해준다. 옆 방에 마련된 식당에선 자원봉사자들이 당장 먹을 게 없는 사람들에게 도시락과 과자, 음료 등을 챙겨 건네주고 있다. 아까 그 남자가 음식이 가득 든 ‘복주머니’를 들고 조금 편안해진 표정으로 성당을 나선다.
‘설렘’이나 ‘희망’을 말하기 민망한 새해다. 내 앞길도 막막하니 주변을 둘러볼 여유 같은 건 없다. 하지만 그 가운데도 나락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누군가를 끌어올려 복주머니를 건네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자원봉사자가 말했다. “여기 오는 분들을 보면 코로나 전만 해도 정말 평범하게 살던 분들이 많아요. 우리 삶의 기반이란 게 얼마나 약한지 감염병 때문에 알게 됐다고 할까요.”
빈손으로 귀가하기 영 아쉬워 좋아하는 빵집에 들러 ‘랜덤 빵’ 복주머니를 샀다. ‘당연히’ 맛있는 빵이 많았고, 먹지 못할 빵은 없었다. 올 한 해 견딜 만한 일들만 일어난단 뜻이려니, 멋대로 해석했다.
이영희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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