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정의 왜 음악인가] 마스크 뚫고 나온 높은 음
‘혹시 실수로 벗지 않은 건가.’ 지난달 20일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유튜브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보다 이런 생각을 했다. 성악가 박종민(베이스)이 화면에 등장해 노래하는데 두꺼워 보이는 하얀 마스크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성악가의 낮은 음은 건강해야 한다. “친구들이여! 이런 노래가 아닌, 더 즐겁고 기쁜 노래를 부릅시다!”라고 외치며 일어나는 부분이다. 그런데 마스크라니….
이어서 등장한 소프라노, 메조, 테너도 마스크를 쓰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실수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아무리 코로나19 시대지만, 성악가까지 마스크를 쓰고 노래하는 장면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KF94짜리 ‘진짜’ 마스크였다. 성악가 네 명 뒤쪽의 합창단 24명도 모두 마스크를 쓰고 힘껏 노래했다. 성악가들은 입을 움직이다가 턱으로 내려가거나 코로 올라가는 마스크를 잡아채 가며, 어려운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소리는 잘 들렸다. 이날 음향을 담당한 최진 감독은 “높은 음, 자음이 문제였다”고 했다. “녹화 전 리허설을 했을 때, 낮은 음은 마스크를 뚫고 나오는데 높은 음은 가로막혀 녹음 마이크를 손봤다. 또 자음이 들리지 않아, 성악가와 합창단에 자음을 특별히 강하게 발음해 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소프라노의 높은 음과 자음은 마스크를 뚫고 나왔다. “다 함께 모여 환희의 노래를 부르자.” 음악에 몰입한 지휘자의 마스크는 입속으로 들어가기까지 했지만 결국 인성(人聲) 교향곡은 여느 때처럼 성대하게 끝났다.
베토벤 ‘합창’ 교향곡은 모든 사람의 화합을 강조하며 연말마다 전 세계에서 공연된다.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는 “천지창조에서 인간처럼, 이 곡에서 성악은 최상의 자리에 있다”고 했다. 바로 그 성악 때문에 코로나 시대 금지된 비말이 가장 극적으로 튀는 곡이다. 따라서 올해는 못 듣나 싶었는데 서울시향은 오케스트라 규모를 줄이고, 성악가에게 마스크까지 씌워 합창 공연을 하고야 말았다. ‘뭐 이렇게까지 하나’는 댓글도 따라왔다.
음악학 석사, 물리학 박사 학위를 가진 영국인 존 파웰은 음악이 사람을 과학적으로 위로한다는 주장을 위해 책을 여러 권 썼다. 뜨거운 물에 손을 넣고도 좋아하는 음악을 들었던 사람들은 오랫동안 버텼다거나, 우울증과 수면 장애에 음악이 점진적 도움을 준 이야기를 전한다. 음악이 우리 몸에서 고통의 신호를 교란한다. 그래서 그는 ‘유사시의 음악 리스트’를 꼭 만들어놓으라고 조언한다. 의사소통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플 때 그 리스트의 음악을 누군가 틀어준다면 아픔이 나아지리라는 뜻이다. 지금이 바로 그 음악 리스트를 만들 때다. 이렇게 피폐할 때도 음은 어떻게든 마스크를 뚫고 날아온다는 걸 봤으니 말이다.
김호정 문화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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