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것 아닌 일에도 복수심 이글.. PTED일 수 있습니다

민태원 2021. 1. 4.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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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 사건에 기인한 적응 장애
화병·PTSD와 다른 심리적 질환
질병 코드 없지만 한국인 40% 해당
취업난·결혼부담 등 사회요인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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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회사에 다니는 30대 한모씨는 올 초 파견나온 다른 회사 직원과 갈등을 겪는 과정에서 상대방이 휘두른 물건에 하마터면 크게 다칠 뻔했다. 문제는 사건 이후였다. 회사에 항의하자 “안 다쳤는데 괜찮지 않느냐”며 무마하려 했고 가해 직원도 아무런 일 없다는 듯 근무를 계속했다. 피해자임에도 부당한 대우를 받는 자신의 처지와 회사의 대처에 억울함과 분노, 복수심이 커졌고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한씨를 진료한 의사는 처음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의심했지만 사건처리 과정에서 겪은 부당한 대우에 기인한 증상 발현이 많은 점에 주목하고 ‘외상후울분장애(PTED)’로 진단했다.

부당한 경험 후 울분 증상 호소

외상후울분장애(PostTraumatic Embitterment Disorder)가 정신의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1990년대 독일에서 처음 도입된 개념으로 2000년대에 본격 연구되기 시작했다. 국내에선 2012년 PTED 진단 척도가 표준화됐고 이후 정신의학계와 사회학, 보건학계를 중심으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2014년 세월호 사고는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PTED는 일상에서 겪는 부정적 사건에 의해 촉발되는 적응 장애다. 사고, 실직, 이혼, 별거, 상실, 사별 등 개인 인생의 중요한 사건 뒤에 나타난다. 해당 사건이 정당(공평)치 못하고 굴욕감을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울분, 분노의 감정을 주 증상으로 자기비하, 무력감, 패배감이 따른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그 일이 떠올라 괴롭기도 하다(사건 회상). 복수의 감정도 생긴다. 이런 증상들이 6개월 넘게 지속될 때 PTED를 의심할 수 있다.

주요 우울장애와 불안장애에 섞여 나타나기도 한다. PTED 입원 환자의 50% 이상이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공존 질환으로 갖고 있었다는 해외 연구가 있다. 주요 우울장애 환자의 30.4%가 PTED를 동반했다는 국내 연구결과도 있다.

국내외적으로 PTED에 대한 질병 분류 코드가 지정돼 있지 않아 환자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고려대 한창수 교수팀이 2017년 발표한 연구논문에 따르면 일반 한국인 10명 가운데 4명 정도가 장기간 울분감으로 고통받고 있는 걸로 나타나 우리 사회에 울분의 감정이 꽤 깊숙이 자리잡고 있음을 가늠할 수 있다.

해당 연구는 2015년 만 19세 이상 2101명을 대상으로 ‘외상후울분장애 자가보고 척도(PTEDS)’를 활용해 점수를 산출했다. PTEDS 점수는 부정적 생활 사건에 대한 울분 반응의 특성을 평가하는 19개 문항으로 구성된 질문지로 문항당 0~4점을 표시하고 총점을 19로 나눈 값이다.

산출 결과 전체의 42.7%가 평균 점수 1.6이상을 받아 경증 및 중등증의 울분감을 갖고 있었다. 이 가운데 13.3%는 평균 2.5 이상의 심한 울분장애에 해당됐다. 이는 2009년 독일 일반 인구의 중증 이상 울분장애 유병률(2.5%)보다 5배 높은 수치다. 특히 30대와 저소득층에서 PTEDS 점수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고용 불안정과 취업난, 결혼·양육 부담, 스트레스 등 사회경제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화병, PTSD와 구별해야

‘화병(Hwa-byung)’은 문화 관련 증후군으로 미국 정신과협회의 정신건강진단 편람에 공인된 질환이다. 분노의 감정과 함께 나타나는 끓어오르는 느낌, 가슴 답답함, 두통, 입마름 등의 신경성 신체 증상이 진단의 중요한 요소다. “30년 시집살이 속에서 마음의 응어리, 화가 쌓여 어느 순간부터 가슴이 벌렁거리고 울화가 치민다”고 표현되는 게 대표적이다.

반면 PTED는 신체 증상 보다는 불공정함 등에 대한 만성적 분노와 박탈감 등 심리적 요인을 보다 강조한다. 고려대 안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신철민 교수는 “화병이 한의 정서가 많은 한국인에게 특화된 질환이라면 울분장애는 좀 더 보편적인 질환”이라고 설명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와도 구별된다. PTSD는 자신 혹은 타인의 실제적 또는 위협적인 죽음이나 신체 보전에 위협을 가져다주는 사건을 경험하거나 목격, 직면했을 때 극심한 두려움과 무력감, 공포를 느끼는 질환으로 불안장애의 범주에 속한다.

반면 PTED 환자 중에는 삶에 위협을 주거나 죽음에 가까운 사건이 아님에도 불안, 무력감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또 크지 않은 생활 사건 후 불안 증상이 아닌 분노, 화, 울분 등 다른 형태의 감정을 호소하기도 한다. 복수심을 보이는 것도 PTSD와 다른 점이다.

“코로나 잦아들면 울분장애 증가”

코로나19사태의 장기화는 PTED 발병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신 교수는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한 피해를 헤쳐 나가느라 바빠 자신이 울분장애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면서 “코로나 상황이 나아지면 1년 내에 울분장애로 병원을 찾는 이들이 10~20% 증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우울과 불안(코로나 블루)을 넘어 감정이 분노로 폭발한 상태를 지칭하는 ‘코로나 레드’가 울분장애와 가깝다.

정부 정책에 의해 영업을 강제로 중단하게 된 점포 운영자, 부득이하게 격리하게 된 접촉자, 지나치게 길게 입원하게 된 환자 등이 PTED 고위험군이다. 최근 공평과 정의가 무너진 듯한 상황에서 울분을 느끼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아 더욱 관심을 귀울여야 하는 질환이다.

신 교수는 “PTED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그 존재를 인식하고 적합한 치료를 제공하면 되지만 울분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사회 전체 구성원의 참여가 필요하다”면서 “사회에 모든 종류의 차별과 불합리, 부당한 권력 남용의 가능성을 최대한 줄여나가는 노력이 동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PTED는 우울, 불안, 자살생각, 충동조절 어려움 등의 증상을 동반하기 때문에 약물 및 정신 치료를 병행한다. 다만 우울증 증상은 약물로 잘 치료되는 경향이 있는데 울분의 감정은 우울증 치료 후에도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에게는 약물 치료와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 신념을 파악하고 교정하는 인지행동 치료와 현재의 감정 상태를 조정해 새로운 인생관을 갖게 하는 지혜 치료로 접근해야 한다.

신 교수는 “외상후울분장애를 방치하면 그 자체로 고통을 받게 되고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대인 관계, 직업생활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서 “울분장애 취약층을 위한 보건정책 수립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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