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나' 꿈꾸는 소년.. 은닉된 존재의 해방
[안치용 기자]
▲ <걸> 스틸컷 |
ⓒ 더쿱 |
아이덴티티(identity)라는 영어는 이미 한국어가 된 듯하다. 신분, 정체성, 동일성 등 문맥에 따라 여러 의미로 사용될 수 있지만, 문맥을 파악해서 일상에서 혼동 없이 잘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페이스-아이디'란 말이 완전한 외국어이지만 못 알아듣는 사람이 없고 굳이 한국어로 변용하려는 시도도 없어 보인다.
아이덴티티란 말을 '아이디'란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 번역할 땐 크게 정체성과 동일성의 두 가지 단어가 사용된다. 한국어에서 두 가지 개념으로 분열했다는 뜻은 아이덴티티에 두 가지 개념이 포함되어 통합하거나 갈등할 가능성을 갖는다는 뜻이겠다. 사실 정체성은 동일성 없이 불가능하고, 동일성은 정체성 없이 확보되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이란 성(性)정체성
제71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서, 그해 가장 주목할 만한 신인 감독에게 주는 황금카메라상과 주목할 만한 시선 남우주연상 등을 수상한 <걸(girl)>은 성(性)정체성을 다룬 영화이다.
15살 트랜스젠더 혹은 트랜스섹슈얼의 '트랜스'를 그렸다. 트랜스젠더와 트랜스섹슈얼의 정의와 관련한 논란이 너무 많기에 여기서 트랜스젠더는 자신의 생물학적 성과 자신의 정신적 성이 불일치하는 사람, 트랜스섹슈얼은 그러한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해 의학적 조처를 하는 사람이란 의미로 사용키로 한다.
주인공 라라(빅터 폴스터)는 발레리나를 꿈꾸며 사춘기를 통과하는 중이다. 자신의 '트랜스'는 가족으로부터 인정받고 또한 적극적으로 도움을 받고 있다. 전면적인 성전환에 앞서 호르몬 치료를 받고 있는, 남성 성기를 지닌 소녀이다. 일반적으로 성전환은 성인에게 허용된다.
정체성은 내부의 동일성과 외부의 동일성이 일치할 때 명확하게 확보된다. 트랜스젠더를 예로 들면, 내면의 동일성은 자신의 몸과 자신의 정신 사이의 일치인데 이 일치가 확보되지 않음으로써 분열이 발생한 상태가 트랜스젠더이다. 여기서 일치와 불일치에 관하여 판단하는 주체에게 종의 정체성이 이미 사전적으로 확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돌출한 성기 형태를 통하여 남성이란 판단이 부여되고 또한 수용된, 개인에게 이러한 몸의 정체성이 정신의 정체성과 충돌하여 불편과 혐오를 야기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분열이 일어나지 않고 따라서 '넘어섬'(트랜스)이 필요하지 않다.
내부의 동일성 판단은 외부의 동일성 판단과 긴밀하게 연계된다. 약간 다른 작동 메커니즘이 있기 하지만 두 가지 흐름은 되먹임한다. 내부와 외부, 정체성과 동일성은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개인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주체의 설정에 관한 판단을 가능케 한다. 주체를 구성하는 많은 아이덴티티와 달리 성(性)아이덴티티는 양자택일을 폭력적으로 강요하기 마련이다. 유성생식에 기반한 포유류라는 생물학적 조건과 가부장제 문명의 존립 방식이 통합적으로 작용하는 폭력이란 설명이 가능해 보인다. 이미 사회적으로는 답이 나와 있는 이 양자택일에서 머뭇거리게 되면 주체는 불가피하게 분열한다.
그러나 분열이 일어난다고 모두 '넘어섬'을 모색하지는 않는다. 분열에 직면해 어떤 이들은 억압을 통한 강제적 일치에 순응할 것이다. 혹은 순응과 무관하게 강제적 일치가 강제되기도 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분열하는 이들은 대체로 이러한 '강제적 일치' 과정을 거칠 터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치를 수용하지 못하게 되면 '넘어섬'이 힘겹게 시작된다.
영화 <걸>의 '넘어섬'은 이중의 '넘어섬'이다. 사춘기는 아이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뜻하고, 이미 사춘기의 이러한 보편적 '넘어섬'을 경험하는 와중에 소녀 라라는 육체의 남성성의 '넘어섬'이란 특수한 과도기를 함께 겪어낸다. 영화 <걸>은 이 중첩된 '넘어섬'을 고통과 고독 속에 완주하려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미운 오리 새끼처럼, 동일성과 정체성의 통과의례를 돌파하는 모습에서 일종의 동화적 면모를 발견할 수도 있다. 고통의 강도와 존재의 위기를 논외로 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 <걸> 스틸컷 |
ⓒ 더쿱 |
영화 <크라잉 게임>에서처럼 <걸>에서도 성기가 노출된다. 누군가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상황에서 성기노출이 제시된 <크라잉 게임>과 달리 <걸>에서는 혼신의 힘을 다한 성기은닉의 틈새에서 자신과 대면하는 성기노출이 묘사된다. <크라잉 게임>의 성기노출은 극중 노출과 (관객을 겨냥한) 화면 노출이 동시에 일어나지만 <걸>에서는 극중 은닉과 화면 노출로 나뉘며, 화면 노출도 거울을 통한다. 남에게 보여줄 수 없고 자신만이 숨어서 바라봐야 하는 거울 속의 몸은 비애(悲哀) 그 자체이다.
영화에서 이웃집 소년과 '성적 사건'을 기도한 이후에 라라가 거울 앞에 선 장면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 슬픔을 형상화한 듯하다. 남성 성기노출을 통해 이렇게 애잔한 정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서, 이 영화가 데뷔작이라는 루카스 돈트 감독의 역량을 느끼게 된다.
성기은닉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주로 여성의 성기를 대상으로 하며, 은닉과 노출 사이에 문화적이고 권력적인 절차와 게임, 혹은 폭력이 개입한다. 반면 라라의 극중 '성적 사건'에서 병행된 것과 같은 필사적인 성기은닉은, 여성이 행한 자신 몸의 남성 성기 은닉이란 역설을 포함한다. 일반적으로 여성이 처한 맥락과 달리 라라의 성기은닉은 부재의 은닉이란 고통을 역설한다.
영화의 결론에 해당하는 라라의 선택은, 충격적이고 처참한 것이지만, 존재론의 측면에서 보면 처절한 실존의 확인이자 부재의 노출이고 그러한 과정을 통한 은닉된 존재의 해방이다. 혹자는 고정된 성정체성을 강화한다고 비판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존재를 이토록 열망한 모습을 이 영화처럼 설득력 있게 제안하기가 전혀 쉽지 않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대사 없이, 또 호들갑 떨지 않으며 잔잔하고 비교적 빠르게 진행한 마지막 부분의 감각이 좋았다.
대미의 헨델 음악은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판타스틱 우먼>에서 트랜스젠더 주인공 마리나 역의 다니엘라 베가가 부른 '옴브라 마이 푸'가 <걸>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여성이 되는 사건의 어려움을 에둘러 비유하면서 동시에 원래 헨델 시대에 이 곡을 '카스트라토'라고 하는 거세가수가 불렀다는 역사적 사실을 지시한다.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향한 라라의 여정이 성공적임을 시사하는 일종의 해피엔딩이다.
'넘어섬'은 이루어진다. 세계적인 트랜스젠더 발레리나 노라 몽세쿠흐의 실화를 극화한 영화인 만큼 당연한 결말이긴 하다. 당연하지만 흔하지 않은 결말. "모든 고귀한 것은 드물고 힘들다"라는 <에티카>의 유명한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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