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톺아보기] 기술에 빼앗긴 소소한 것들

2021. 1. 4.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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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철 공학박사, 베스핀글로벌 고문

1990년대 중반 나온 전자수첩은 계산기에 약간의 메모리 기능이 더해져 있었다. 무게도 상당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 불편할 정도였다. 고객 전화번호와 고객이 좋아하는 노래를 저장해 놓고 나름 유용하게 사용했다. 전자수첩을 사용하기 전에는 200개 정도의 고객 전화번호를 외우고 다녔는데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지금에 와서는 가족들의 전화번호도 가물거린다. 노래방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 제목도 함께 잊어버렸다. 국민적 현상일 것이다. 디지털 기술의 확산으로 뇌 기능은 퇴화하고 손가락 운동 신경은 진화하고 있다는 연구도 해 볼만하다.

지금 원고를 쓰고 있는 순간도 컴퓨터 자판에서 활자를 나열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필기구로 장문의 글을 써보는 일은 드물다. 손가락에 굳은 살이 박혀가며 글씨를 쓰다 보면 저마다의 필체가 생기고 가끔 명필도 나오기 마련이다. 지금은 멋진 서체를 가져다 쓰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멋진 필체를 익히는 일은 더이상 나의 능력과는 상관없는 분야가 돼버렸다.

기술의 등장이나 발달로 인해 인간이 궁극적으로 어떠한 세상을 맞이하게 될 지는 미지수다. 비교적 최근에 발생한 트렌드를 잘 기술해 놓은 책이 있다. 제러미 리프킨이 저술한 노동의 종말(The End of Work, 2005)에서는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난 기술 발달과 그에 따른 산업혁명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기술하고 미래의 노동은 제조에서 사회봉사 등 비영리 분야로 이전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산업혁명 초기에 자동화로 인한 대량생산이 이루어졌고, 세이(Say)의 법칙이 말해주듯 당시의 경제학자들은 공급이 수요를 창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대량생산은 노동자의 일자리를 기계가 대신해주는 것이므로 실제로는 노동계층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현상을 인류는 경험했다.

미국의 계층적인 조직은 대량생산에는 유리하지만, 생산과정에서 재고가 많이 발생하는 등 비합리적인 요소들이 발견됐다. 아울러 팀 간 소통이나 협업에도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해서, 당시 미국 IBM에서는 고객에게 전달할 견적서를 작성하는데 팀끼리 서류와 자료를 주고 받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4주가 걸렸다고 한다. 지금은 불과 수시간이면 되는 일이다. 미국의 기업들은 기존의 대량생산 방식과 계층적인 조직을 효과적으로 시장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기 위해 일본의 린(Lean)생산 방법론과 수평적인 팀조직을 도입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간 관리자 일자리가 대폭으로 줄어드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리고 대량생산된 물품들은 시장의 포화를 감당하지 못하게 됐고, 결국 수요에 맞게 생산을 줄여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생겼다. 시장 상황이 스스로 세이의 법칙이 틀렸다고 증명한 셈이다.

기술이 빼앗아가는 것이 있다면 질량보존의 법칙처럼 찾아오는 것도 있지 않을까? 생각을 조금 달리해보면 해석의 차이에서 큰 발견을 할 수도 있다. 나는 기술에 일자리를 빼앗겨서 실업급여를 받는 실업자가 된 것일까? 아니면 기술이 나의 일을 대신해주고 나는 여가시간을 즐길 인간적인 삶을 선물 받은 것인가? 그렇다면 실업수당은 휴가비 정도로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선진국이라고 해도 대부분의 교육은 여가를 잘 즐기는 삶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정년퇴직이라는 지점까지 어떻게든 경제 활동을 해야 하는 것으로 프로그래밍 돼 있다.

기술이 사람에게 시간이라는 귀중한 선물을 주고 있다면, 시간으로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고민을 폭 넓게 해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팍팍한 삶을 살아내느라고 접어두었던 젊은 날의 버킷리스트를 다시 한 번 들여다 본다면 거기에 힌트가 있을 수 있다. 위에 인용된 노동의 종말 저자인 제러미 리프킨은 봉사활동을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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