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과 치정 늪에 빠지지 않은, 진정한 '어른 멜로'
[장혜령 기자]
▲ 영화 <가을의 마티네> 포스터 |
ⓒ 찬란 |
영화 <가을의 마티네>는 인간의 내면에 대한 깊은 탐구를 즐기는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장편소설<마티네의 끝에서>를 원작으로 한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스물셋에 일본 최고의 문학상 아쿠타가와상을 받았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인지도가 제법 있는 일본 작가다.
이번 작품은 안정된 스토리텔링과 멜로 장인 니시타니 히로시가 연출을 맡아 화제가 되었다. 그는 드라마 <하얀거탑> <갈릴레오> 시리즈부터 시작해 <도쿄 타워>, <용의자 X의 헌신>, <평일 오후 3시의 연인> 등을 만들었다. 영화에선 '일본의 정우성'이라 불리는 대표 배우 후쿠야마 마사하루와 배우와 수필가, 사진작가로 활동한 이시다 유리코가 만나 중년에서야 깨닫게 된 운명적 사랑을 말한다.
무엇보다 가슴을 저미는 클래식 기타 선율이 영화 내내 지배하고 있는데, 이를 제3의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재 기타리스트와 기자의 6년간의 엇갈린 사랑을 일본, 프랑스, 스페인, 미국을 배경으로 담아내 이국적인 분위기도 더한다. 잊힌 듯하지만 어렴풋이 남아 지워지지 않는 기억, 나이 들어 퇴색한 감수성을 다시금 꺼내 보기 좋다. 진정한 어른들의 멜로, 중년 로맨스를 불륜과 치정의 늪에 빠지지 않고 아름다운 지성의 사랑으로 끌어올렸다 할 수 있다.
▲ 영화 <가을의 마티네> 스틸 |
ⓒ 찬란 |
▲ 영화 <가을의 마티네> 스틸 |
ⓒ 찬란 |
촉망 받는 기타리스트 마키노(후쿠야마 마사하루)는 자신의 공연에 참석한 프랑스 REP 기자 요코(이시다 유리코)를 만난다. 그녀는 마키노가 OST에 참여한 영화의 감독 예르코 소릿치의 딸. 그는 그녀에게 운명처럼 첫눈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요코 또한 앙코르곡이었던 브람스의 곡을 칭찬하며 어릴 때부터 마키노의 연주를 들어왔다고 말하며 호감을 표시한다. 둘의 만남은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요코는 약혼자가 있었고 둘은 서로에 대한 마음을 간직한 채 각자의 삶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파리로 간 요코는 테러로 말미암아 동료를 잃고 큰 트라우마를 입는다. 걱정된 마키노는 영화 <행복의 동전> 뒷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며 이메일을 줄기차게 보낸다. 하지만 요코는 아직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한 상태, 마키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천천히 조금씩 일상을 나누며 친분을 쌓아간다. 그렇게 두 사람은 파리의 한 레스토랑에서 두 번째 만남을 갖는다.
이 만남에서 마키노는 요코에게 진심을 내비친다. 그리고 저돌적인 고백을 한다. 하지만 요코는 20년 지기 친구이자 곧 결혼을 앞둔 연인을 저버릴 용기가 없었다. 또한, 단 두 번의 만남으로 일생일대의 선택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연이어 큰일을 겪으면 단단한 사랑을 확인한다. 그렇게 요코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마키노는 스승님의 공연 참여차 스페인 마드리드로 향하게 된다.
사실, 마키노는 요코를 만나면서 극심한 슬럼프에 빠져있었다. 스스로 연주에 만족하지 못한 채 이 길이 맞는지 되물으며 열정 또한 사라지고 있던 찰나였다. 결국 요코에게서 대답을 기다리던 중 극심한 스트레스로 마드리드 공연까지 망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 영화 <가을의 마티네> 스틸컷 |
ⓒ 찬란 |
영화는 '사랑'의 의미가 퇴색한 시대에 깊고 아련한 울림을 전해준다. 둘은 일본에서 재회하기로 약속했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엇갈리게 된다. 서로 풀지 못하고 꼬인 단단한 오해를 머금고 무심한 세월은 속절없이 흐른다. 사랑의 의미야 차이가 있겠지만 일과 가정이 있는 상황에서 정도를 지키는 절제된 모습은 중년의 위기를 무색하게 한다. 상대방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심정이 두 베테랑 배우의 섬세한 연기 안에서 살아 움직인다. 끝까지 둘의 선택을 지켜보며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는 등 몰입도가 상당하다.
다만 원작의 국제정세와 사회 정치적 상황, 인간의 탐욕 같은 날카로운 주제관은 배제되고 로맨스로 치중된 각색이 살짝 아쉽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세상의 중심에서 한 발짝 물러나면서 찾아온 공허함과 쓸쓸함을 자신의 성장으로 승화한다. 위기 앞에 서 있던 마키노와 결혼 후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았던 요코가 내외적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응원하게 만든다. 그래서 "과거만이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게 아닌, 미래 또한 과거를 바꿀 수 있다"라는 상징적인 대사는, 슬픔과 상처를 이겨낸 자가 누릴 수 있는 주체성 회복이란 주제관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세대교체가 본격화되고 은퇴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는 세대가 마지막으로 힘을 내 삶을 개척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는 고무적이다. 일과 사랑에 모두 열정적이던 청년기를 지나 안정적인 중년에 접어들며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내는 중년의 위기를 재해석했다. 서로 사랑하지만 절제라는 성숙한 어른들의 사랑, 핸드폰만 있으면 지구 반대편에서도 만날 수 있는 시대에 뜻밖의 아련함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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