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억원짜리 그림을 파쇄한 뱅크시를 재현하다, 뮤지컬 '그라피티'
[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2018년10월6일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장. 회화 한 점이 104만2000파운드(약 15억4000만원)에 낙찰되자마자 파쇄됐다. 액자 속에 설치된 분쇄기에 의해 그림이 잘린 것. 뱅크시가 그린 '소녀와 풍선'이라는 그림이었다. 작품을 파쇄한 주인공은 그림을 그린 뱅크시 자신이었다.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그라피티'는 이 소동을 무대 위에서 재현한다. '그라피티'의 주인공 '나비스'는 뱅크시를 모델로 만든 캐릭터다.
극은 호기롭게 시작한다. 역동적인 음악과 함께 무대를 채우는 첫 넘버 제목은 '에덴'. 뮤지컬 '그라피티'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가상의 도시다. 역설적이게도 에덴은 빈부 격차가 극심한 지옥 같은 천국이다. 에덴 넘버 중 가진게 없으면 고개도 들지 말라는 가사가 인상적으로 들린다. 뱅크시도 그림으로 자본주의에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 흥미로운 시작.
나비스 외 주요 등장인물은 뷰포트 부자다. 아버지 클라인은 에덴시의 시장, 세계적인 기업가, 예술재단의 대표다. 돈과 권력을 모두 쥔 인물.
클라인은 현대미술 작품을 매매해 돈을 번다. 하지만 클라인의 현대미술에 대한 태도는 위선적이다. 클라인은 한 신인 작가의 그림을 두고 어린 조카가 그린듯한 그림이라며 쓰레기 취급을 한다. 그러면서 쓰레기 그림이라도 자신이 개입하면 비싼 그림이 된다며 작가에게 그림을 팔라고 한다. 아들 타일러는 위선적이고 허영으로 가득 찬 클라인에게 반감을 갖고 있다.
지옥 같은 천국의 도시 에덴에서 돈과 권력을 쥔, 위선적이고 허영으로 가득 찬 인물 클라인 뷰포트. 극은 도입부에서 뚜렷한 지향점을 보여주며 관객을 몰입하게 만든다. 반어적인 의미를 담은 에덴이라는 도시 이름과 타일러가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에게 메디치로 불리는 설정도 흥미를 끈다.
클라인과 타일러는 그라피티를 두고 결정적으로 다른 가치관을 보여준다. 클라인이 그라피티를 불법으로 규제하는 반면 타일러는 클라인 몰래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을 돕는다. 메디치가는 14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예술가들을 후원하며 르네상스가 일어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타일러가 메디치로 불리는 설정은 충분히 흥미를 끈다.
여러 흥미로운 설정과 인물들에도 불구하고 뮤지컬 '그라피티'는 창작 초연이라는 점에서 극의 밀도를 좀더 높여야 할 필요성이 엿보인다. 호기로운 시작과 달리 극은 갈수록 힘이 빠지는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 뱅크시를 모델로 만든 캐릭터 나비스의 역할이 모호하다. 실제 극에서 아버지 클라인과 아들 타일러가 대치하며 더 주역 역할로 부각되고 나비스는 전체 이야기에서 겉도는 느낌을 준다.
이와 관련 대본을 쓴 김홍기 작가는 나비스라는 아티스트의 행적을 추적하기보다 그를 추종하거나 비난하고 이용하는 여러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작품 의도를 밝혔다. 주인공인 나비스보다 뷰포트 부자가 더 부각되는 설정은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현실 세계에서 뱅크시는 반전, 반자본주의 등 뚜렷한 메시지를 통해 본인이 원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부각시켰다. '그라피티'에서 나비스는 스스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낙서쟁이일 뿐이라며 자신이 부각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극에서 나비스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있지만 반전, 반자본주의 등 현실 세계의 뱅크시처럼 강력하지는 않다. 극은 나비스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동화적으로 풀어내는데 뱅크시를 염두에 두고 있다 보니 그 메시지가 약하고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느낌을 준다. 이 때문에 타일러가 나비스를 추종하는 이유도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결국 타일러가 아버지 클라인에게 저항하는 명분도 힘을 잃게 만드는 느낌이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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