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빤 태어날 때부터 남자였어?".. 이 질문에 담긴 의미

김준모 2021. 1. 3.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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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걸> 소년과 소녀의 경계에 선 라라의 마음을 은유적으로 담다

[김준모 기자]

 영화 <걸> 포스터
ⓒ 더쿱
 
소년과 소녀의 경계에서 발레리나를 꿈꾸는 16살 라라의 이야기를 다룬 <걸>은 성정체성을 섬세하게 담아낸 영화다. 흔히 성 정체성 소재의 영화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갈등을 중심으로 거칠게 극을 이끌어가기 보다는, 꿈을 향해 달려가던 라라가 겪는 고통을 담아낸다. 외적인 변화가 내적인 변화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깊이 있게 보여준다.
첫 번째로 주목할 지점은 라라의 가정이다. 라라에게는 택시 운전 일을 하는 아버지 마티아스와 남동생이 있다. 그들 가정에는 어머니가 없다. 라라의 고민을 섬세하게 이해하고 다독여줄 사람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마티아스는 여자가 되고 싶은 라라의 꿈을 지지해 주고, 병원 치료도 적극적으로 돕는다. 라라가 독일 최고의 무용학교로 진학하도록 돕는 건 물론, 이전 동네에서 겪었던 아픔에서 벗어나게 만들기 위해 이사를 감행한다.
  
 <걸> 스틸컷
ⓒ 더쿱
 
아빠 마티아스는 라라에게 헌신적이지만, 막상 마음을 섬세하게 안아주지는 못한다. 라라가 성 전환 문제에 대한 고민으로 눈물을 보일 때면 힘든 일이니 참고 견뎌내라 말한다. 뒤에서 묵묵하게 라라를 미뤄줄 마음은 준비되어 있지만, 그 내면의 고통을 어루만져주지는 못한다. 이런 상황은 라라의 고통이 해소되지 못하고 응축되는 과정과 후반부 안타까운 선택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심리적 기반을 보여준다.

두 번째는 무용학교에서의 생활을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한 여성이 되는 과정의 어려움이다. 무용학교의 교사는 발끝으로 서는 기본 동작을 가르치며 남들은 어린 시절부터 배우는 것이며 바뀌지 않는 것도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는 보통 8~10세 때 기본 동작을 배우는 학생들에 비해 라라가 늦게 시작한 만큼 어려움이 따른다는 의미지만, 성 전환을 시도하는 라라를 생각할 때 의미심장 하게 다가온다.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는 장면에서도 라라는 친구들 사이에 끼기 위해 모서리에 앉아 식사를 한다. 이 애매한 위치는 라라의 현재를 말한다. 빨리 시작하지 않아 무용을 배우기 애매해진 라라의 나이처럼, 여자로 태어나지 않아 남자도, 여자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 마티아스에게 "아빠는 태어날 때부터 남자였어?"라고 물어보는 장면이나 첫 수업 때 라라가 탈의실을 쓰는 게 괜찮으냐고 담임교사가 물어보는 장면은 이런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걸> 스틸컷
ⓒ 더쿱
 
동료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의 표현 역시 은유적이면서 섬세하다. 학생들은 처음부터 라라의 정체성을 이유로 괴롭히지 않는다. 시작은 눈빛이다. 라라가 남성의 힘과 여성의 섬세함을 동시에 갖춘 동작으로 주목을 받자 슬슬 시기와 질투의 눈빛들이 보인다. 다음은 샤워실이다. 한 학생은 라라에게 같이 샤워실을 써도 된다며 들어가 샤워하라고 한다. 여성의 가슴에 대한 동경이 있는 라라는 함께 샤워를 하고 수영장을 쓰며 부러움과 동질감을 느낀다.

라라가 동질감을 느끼기 시작하자 바로 다음 단계를 향한다. 우리의 알몸을 보여줬으니 네 알몸을 보여 달라 나오는 것이다. 이 지점은 라라에게 큰 상처로 다가온다. 함께 무용을 하면서 호의를 베풀었던 학생들의 마음이 사실은 자신에 대한 호기심과 특수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좌절을 겪는다. 항상 미소를 보였던 라라는 이 순간 처음으로 눈물을 보인다.

마지막은 사랑이다. 라라는 모든 일을 성 전환 이후로 미루고자 한다. 청소년기는 일생에 한 번 밖에 없다며 이 순간을 즐기라는 마티아스의 말에도 완벽한 여성이 된 후 행복을 누리고자 한다. 허나 눈앞에 사랑이 다가오자 라라의 마음은 조급해진다. 이 조급함은 호르몬 투여량을 늘리고자 하는 모습과 발레에 지나치게 열중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는 스스로의 몸을 망치고, 꿈과 사랑 양쪽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걸> 스틸컷
ⓒ 더쿱
 
사랑에 빠진 라라는 친구들이 보여준 편견의 시선이 자신에게도 있음을 발견한다. 스스로 남성도 여성도 아니라 여기며, 사랑을 두려워하고 겁내고 있는 자신에게 과연 이 선택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지닌다. 작품은 피아노의 음계를 따라가듯 낮은 음부터 높은 음까지 점점 라라의 감정을 격화시키더니, 마지막 순간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주인공과 관객 모두에게 동시에 전달한다.

<걸>은 대사와 장면을 통해 은유적으로 라라의 현재와 마음을 보여주며 밀도 높은 감정을 선사한다. 여기에 갈등 구조를 점층적으로 이끌어 내며 호기심을 자극한다. 집, 학교, 병원 세 장소에서 라라가 겪는 고민을 다채롭게 표현하며 심리적인 저변을 넓히는 시도도 선보인다. 이런 시도는 연출은 잔잔하지만 반복되는 장면이나 감정이 없어 지루함 없이 깊은 공감을 자아낼 수 있는 힘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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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준모 시민기자의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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