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언제까지 꿈에 미쳐야 할까

2021. 1. 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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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딱 하나만 하기로 했다.

내가 스무 살 무렵에 유행했던 책들은 대부분 ‘미쳐라!’라고 외치고 있었다. 꿈에, 공부에, 재테크에, 하다못해 감정을 표현하는 순간까지. 영문도 모른 채 무언가에 미치기 위해 매년 거창한 목표를 세웠다. 실패하고 쪼그라드는 과정을 반복하며 자괴감만 깊어갔고, 20대 중반이 돼서야 계획을 바꿨다. ‘안 되겠다. 매년 새로운 도전을 하자. 딱 하나만!’ 그래서 4년 전엔 다니던 회사에서 개인 KPI를 달성했고, 3년 전엔 운전면허를 땄다. 2년 전엔 첫 책을 냈고, 지난해부터 강연을 시작했다. 딱 하나만 하자고 생각하니 두려움은 줄어들고 용기는 커졌다. 그리고 의미와 기억이라는 뚜렷한 성과가 남았다. 한 해를 돌아봤을 때 의미 있는 기억 하나만 꼽을 수 있어도 마음이 편해졌다.

올해의 도전은 뭐였을까? 혼자 유럽 여행을 가볼까 했던 계획은 우리 모두가 아는 이유로 인해 불가능해졌고, 외부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선택지가 줄었다. 혼란스러운 상태로 상반기가 훌쩍 지나갔다. 삶은 이상하게 흐른다 했던가. 그렇게 9월이 왔고, 감히 31년을 살면서 가장 큰 도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건이 생겼다. 강연 프로그램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이하 〈세바시〉)에 출연하게 된 것이다.

나는 불안장애를 10년 넘게 앓고 있다. 낯선 상황이 오면 얼굴은 붉어지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며 헛소리를 늘어놓는 경우가 태반이다. 수십 회가 넘는 강연을 다녔음에도 여전히 강연을 앞두고 항불안제를 먹는다. 그런 내가 〈세바시〉 출연이라니? 시작은 도전을 향한 패기보다 책 홍보 때문이었다. 마침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합본이 나왔고, 그동안 쌓아온 강연 덕분에 내 안에 꽤 많은 이야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출판사 대표님의 조심스러운 출연 제안을 나는 수락했다. ‘그래, 하자. 책 홍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야.’

출연이 결정되자마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출연 일정이 나왔고, 방송 홍보가 시작됐다. 〈세바시〉 제작팀으로부터 ‘백세희 강연자님, 강연회 안내 메일입니다’라는 메일을 받고 나자 비로소 손이 떨려왔다. 강연회 안내부터 사전 준비, 초고와 최종 원고에 대한 설명, 첨부된 파일 속 ‘짧은 강연 구성 전략’까지. 본격적이고 치밀했다. 생방송, 형식적인 큐카드는 있으나 원고는 모조리 외워야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유튜브 채널에 내 모습이 영원히 ‘박제’된다는 것이었다. 후회가 밀려왔다. ‘네가 드디어 돈에 눈이 멀었구나. 책 홍보하려고 〈세바시〉에 나가? 넌 이제 망했다.’

잠을 자지 못했다. 전문가로부터 빠른 피드백이라도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미친 듯이 초고를 써서 보냈고, 방송국 앞에서 작가님을 만나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사실 책 홍보 때문에 나가려고 한 건데 후회하고 있어요. 이런 마음으로 뭘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작가님의 반응은 의외였다. “책 홍보가 어때서요? 홍보를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도 작가님 책을 읽고 위로받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언젠가부터 내 책을 홍보하는 일을 책팔이, 돈벌이로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처음 책을 낼 때는 그러지 않았었는데(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정말로 큰 지분을 차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울증으로 돈벌이한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고, 돈을 번 것도 사실이었다. 점점 내 책을 홍보하는 게 수치스러웠고, 책을 앞세워 고통을 이야기하는 게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 순간 어제 받은 메일 한 통이 떠올랐다. 왜 이제 이 책을 읽었는지 모르겠다고, 제목만 보고 지나쳤던 게 후회된다는 내용이었다. 그 메일에 감동해 긴 답장을 보냈다. 누군가는 아직도 내 책이 처음일 거고 위로받을 수 있지. 나 또한 그들을 통해 계속해서 위로받고 있는 것처럼.

초고를 엎었다. 남한테 어떻게 보일지만 궁리하던 글을 다 지우고 내가 하고 싶고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썼다. 이렇게 단숨에 글을 쓴 건 오랜만이었다. 진심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으나 최선의 진심을 담았고, 동생이 “UN 연설 나가냐?”고 말할 정도로 수없이 연습했다.

10월의 ‘언택트’ 강연회였다. 수백 명의 청중을 직접 마주하지는 못했지만(차라리 다행이었다. 아마 쓰러졌을지도) 촬영장 무대 앞에 설치된 화면 속에 있는 수십 명의 얼굴을 보면서 궁금해졌다. ‘이들은 왜 이걸 보고 있을까? 굳이 별도로 신청하고 링크를 받아 들어가는 수고를 감수하면서까지. 나와 비슷한 문제를 가진 사람들일까? 아니면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어서? 단순히 궁금해서? 심심해서?’ 내가 어떻게 보일지, 내 이야기가 어떻게 들릴지를 잠시 잊고 하고 싶은 말에 집중했다. 나를 희미하게 만들자 그들의 표정이 선명하게 들어왔고, 교감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무대 앞에 세워져 있던 커다란 스톱워치도 보이지 않았고, 신경 쓰지도 않았다. 떨렸지만 편안했다. 이상한 감정이었고, 내 안에 엄청난 기억이 하나 새겨졌다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2020년이 거의 끝나가는 지금, 〈세바시〉 영상을 확인해 봤다. 조회 수 22만 회. 내게는 엄청난 숫자고, 아마 또 할 수 있을까 싶은 도전이다. 나 자신은 희미해지고 상대가 또렷해지는 느낌을 받으면서 내년엔 그런 도전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대상이 뭐가 됐든 거기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도전을. 그게 뭐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다.

백세희 _ 10년 넘게 겪은 경도의 우울증을 솔직하게 써내려간 에세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로 베스트셀러 작가에 등극했다. 내 마음을 돌보는 일만큼 동물권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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