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에 담긴 정신

조진태 2021. 1. 2.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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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일, 이순신의 전사와 서애 선생의 파직일에 부쳐

[조진태 기자]

코로나가 창궐하면서 일상이 멈추었던 2020년, 임진란 7년 전란의 아픔을 담은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그리고 2021년에도 코로나와의 힘겨운 싸움은 여전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백성의 삶이 송두리째 파괴된 공포와 고통속에서 유성룡이 징비록을 통해 후세에게 전하고 역사의 교훈은 무엇일까? 이를 살피기 위해 정치 지도자로서 7년 전란의 중심에 서 있었던 그의 행적을 한번쯤 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21년 1월 2일은 음력 11월 19일, 4백여 년 전 이날, 전란을 극복한 두 주역이 역사의 중심 무대에서 사라진다. 19일 새벽 여명 무렵, 남해 관음포에서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이 적탄에 맞아 전사한다. 노량 해역에는 시뻘건 불기둥이 된새바람을 뜨겁게 달구고, 총포와 조총이 뿜어내는 화약 연기 속을 비집고 화살과 편전이 날아다녔다.

매서운 강추위 속에서 장수와 병사들이 도주하는 왜군의 목숨을 끝까지 거두려고 사투를 벌이는 순간, 조정에서는 거대한 정치 공세가 마무리된다. 7년 전란을 진두지휘한 영의정 서애 유성룡이 사헌부, 사간원의 지칠 줄 모르는 탄핵을 받고 파직된다.

'파당을 만들고, 왜적과 화친했으며, 유명무실한 개혁정책을 추진해 나라를 도탄에 빠뜨렸고, 안동의 기름진 땅은 모조리 수탈한 탐관오리'라는 죄명이었다. 탄핵상소는 '글을 배운 자치고, 유성룡에게 침을 뱉지 않는 이가 없다'면서 삭탈관작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궁궐을 나선 유성룡은 목멱산 자락 묵사동의 살림을 정리하고, 여기저기 손을 벌려 길양식을 꾸어가면서 안동으로 향한다. 아마 이때쯤은 통제사 이순신의 부음을 전해 듣고 통한에 빠졌을 것이다. 생전에 이순신이 보낸 남해안의 유자 서른 개는 벗을 향한 그리움이다.

7년 전란과 오랜 지기인 이순신의 전사, 가슴 깊숙한 곳에서 느낀 통증이 유성룡에게 여생 동안 징비록 집필을 과제로 남긴다. 낙향 길, 유성룡은 전란 당시 투구를 쓰고 달리던 경기도 대탄에 이르러 시 한수를 남겼다. 겨울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무술년 12월이었다.
 
전원으로 가는 길
벼슬아치 생활, 40년
천변에 말을 멈추고 돌아보니,
한양성 기색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안동에서 유성룡은 삭탈관작된 직첩이 되돌려지고, 1601년 청백리에 이름이 올랐다는 소식을 접해도 '두문불출'로 일관했다. 1604년 선조가 임진왜란의 공신들을 회맹제에 초대했을 때에도 거절했고, 공신의 초상을 그리는 화사에게는 '세운 공이 없다'면서 발걸음을 돌려 세웠다.

그는 이때 짧은 글을 통해 "병이 깊어 강촌에서 스스로를 수양하는 마음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사람들의 발소리만 들어도 두렵다"고 심정을 토로한다. 이 두렵고 떨린 마음이, 자신에 대한 처절한 반성의 기록인 <징비록>을 탄생시킨다.

<징비록>은 "나는 조심스레 스스로를 삼간다"는 시경 주송의 소비편으로 시작해, 전사한 이순신의 생애를 압축한 글로 매듭된다. 유성룡은 "장군이 있을 때, 왜군은 한산진을 감히 범할 생각조차 못했다. 장수와 병사들은 그를 군신으로 받들고 단합했다"고 추모한다.

저술을 마친 유성룡은 안동하회마을을 떠나, 산간 오지 마을 서미동에 '농환재(弄丸齋)'를 짓고, 초동과 더불어 희희낙락 상수리를 줍고 장작불을 지피며 모진 삶을 웃음으로 풀어내는 휴식기를 가진 뒤, 1607년 5월 6일, 자신의 말 그대로 안정을 취해 자연으로 돌아갔다.

자식들에게는 "사람이 욕심에 빠지면 염치를 잃는다"면서 "자신이 취한 곳에 만족하면 사람은 어느 곳이든 살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선조에게 유차를 보내, 공평한 정사의 처리와 낡은 제도의 개혁, 그리고 인재의 고른 등용이라는 통치 원리를 다시 청한다.

1607년 5월 13일, 천릿길 안동에서 서애의 부음이 전해진 한양성, 백성들이 시전의 문을 걸어 닫았다. 새벽부터 목멱산 북쪽 묵사동의 폐허가 된 집터에 가난한 백성들의 발걸음이 구름을 이룬다. 상가는 천리 밖에 떨어져 있었지만, 영정도 없이 지방만이 놓인 노지(露地)에 각 관청의 늙은 아전과 서리 등이 곡식과 베를 내고, 신료들이 거들면서 빈소가 하나 더 마련되었다.

선조실록은 이를 조선조 최초의 자발적인 '백성장'으로 기록한다. 부음을 전해들은 백성들의 통곡과 아픔을 자아내는 힘, 그것은 그가 살아온 여정 때문일 것이다. 징비록에 담긴 서애의 정신이 자신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실록이 증명한다.

정치 지도자로서의 서애는 합리적인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동인에 몸담았지만, 파당의 논리에 매몰되지 않았다. 서인 정철은 임진란이 발발하기 4년 전 기축옥사를 주도하면서, 동인과 무고한 백성 수천여명을 학살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놓고, 동인이 서인을 쓸어버릴 수 있는 절호의 정치적 기회를 맞았지만 유성룡이 서인 편을 들어주면서 무산된다.

이때부터 동인은 남북으로 갈라져 북인은 유성룡을 '배신자'로 낙인찍고, 남인을 서인보다 더 증오했으며 끝끝내 유성룡 탄핵을 주도한다. 자신이 속한 파당을 떠나 제 목소리를 내는 정치인이 과연 얼마나 될 수 있는지 지금도 미지수인 현실이다.

전란 기간 체찰사와 영의정 등 요직을 맡았던 유성룡은 늘 전란의 현장에 서 있었다. 전란이 터지자 평양과 의주를 오가며 명나라 참전을 이끌어 내었고, 임진년 7월 명나라 부총병 조승훈의 군대가 평양성 회복 작전을 전개할 때도 고질병인 치질에 시달리면서 이들의 병참과 기동 지원을 맡았다.

전란 이듬해인 계사년(1593년) 초 평양성 수복 작전을 주도한 명나라 제독 이여송과 함께 조명연합 사령부를 지휘했다. 명나라 군대가 살얼음이 떠다니는 임진강을 건널 때, 백성들과 함께 부교를 만들었고, 임진강 동파역에 최전선 사령부를 꾸렸다. 명나라 총병 사대수는 왜군 자객을 우려해 개성으로 사령부를 옮기라고 사정하다 결국 명나라 군사 수십명을 호위병으로 붙어준다.

그는 전란 막바지인 울산왜성 전투에서도 한겨울의 추위속에 최전선을 지켰다. 정유재란 당시 한양이 다시 함락될 것을 우려해 가솔을 서둘러 피란시킨 신료들은 이후 유성룡을 '화친론자'로 몰아서 탄핵하는 몰염치를 보인다. 힘겨운 현실은 외면하고, 넘치는 글재주로 자신의 무능과 게으름을 덮어버린 정치인들이 사후에 백성장을 받을 리 만무하다.

그는 전란속에서 고통받는 백성의 아픔을 뼈저리게 공감한 지도자였다. 백성을 노역에 동원하면서 매를 들지 않고 공명첩을 빼곡하게 만들어 이들의 공과를 기록해서 훗날의 보상을 약속했다. 명나라 총병 사대수가 죽은 어미의 빈 젖을 빨고 있는 갓난아이를 품에 품고 오자, 그 자리에서 통곡한다. 선조가 피란간 행재소로 향하던 세곡선을 세워 솔잎가루를 빻아 섞은 쌀가루 물을 임진강가에서 백성들에게 나눈다.

쌀가루가 떨어지면서 유성룡이 초조해하자 명나라 총병은 자신의 군량 30석을 빼내 유성룡에게 보탠다.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아픔과 연민의 공감일 것이다. 포로로 잡혀 왜군에게 부역한 백성들의 생명도 함부로 다루지 않았고, 그중 군기시 장인 대풍손은 옥에서 풀려나와 훈련도감의 화약을 제조하는 일에 정성을 다한다. 모든 정치인이 백성을 위한다고 말하지만, 어떤 정치인이 백성을 위하는지 백성들은 결국 알게 되는 것이다.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으로 전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계사년(1593년)과 병신년(1596년) 동안 유성룡은 개혁정책을 쏟아낸다. 그리고 중앙 관료들의 이권을 건드리고, 신분제도를 흔들면서 미운털이 집중적으로 박힌다. 계사년 4월 명나라 군대는 한양성에 입성한 뒤, 진군을 멈추었고 왜군은 고스란히 빠져나가 남해안 일대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진주했다.

유성룡이 몸져 누운 시기, 명나라 장수 낙상지가 유성룡을 찾아, '조선이 아파 대인마저 병이 들었다'면서 조선 병사의 훈련과 진법 훈련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다. 거짓말처럼 자리를 털고 일어난 유성룡은 조선의 직업군인 양성기관인 훈련도감을 태동시켰고, 그해 가을 도제조를 맡아 신분을 초월한 군관의 양성을 시도한다.

또 노비의 무과시험을 밀어붙이면서 노비와 토지를 기반으로 문벌의 부를 지탱하던 사대부들의 공적이 되었다. 이때 사대부들은 본래 노비는 지모가 부족하게 태어나, 군관이나 지휘관이 될 수 없다는 상소문을 서로 돌려가며 읽고 있었다.

제도 개혁은 최종적으로 부패의 온상이었던 공납제도를 건드린다. 지방의 특산물을 현물이 아닌 쌀이나 곡식으로 바꾸어 받는 작미법을 들고 나온 것이다. 농어민들이 바치는 계절, 지역별 특산물에 대해 관청에서 '품질이 낮다'고 시비를 걸어 퇴짜를 놓으면, 이들은 멀쩡한 제 물건을 두고, 시세의 서너배를 주고 방납(防納)업자의 물품을 구입해야했다.

지방과 중앙 관리, 방납업자까지 치밀하게 짜여진 체계적인 비리구조였고, 백성 살림과 국가 재정을 파탄시켰다. 제도가 시행되자 사헌부과 사간원의 관리들은 작미법으로 종이가 올라오지 않아 상소를 올리지 못한다는 고발장을 연일 써대면서 유성룡을 괴롭혔다.

군제와 세제의 개혁은 모두 사대부의 이권을 겨냥했고, 제도의 정착 과정에서 유성룡은 공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치인들은 늘 백성을 사랑한다지만 자신의 이권만은 손상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결국 전란 기간 내내 그가 황소처럼 걸어온 길이, 탄핵 사유로 둔갑해 전란의 마지막 날 파직된다.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수리에는 서애 유성룡 선생의 묘역이 있다. 마을 입구의 수동교회를 지나 차량 한 대가 겨우 지날 만한 좁은 농로를 올라가면, 자그마한 공터가 나온다. 서너 대의 차량을 세울 정도에 불과하다.
 
 안동시 풍산읍 수리 서애 유성룡묘
ⓒ 조진태
 
그 위로 서애 선생의 묘역이 보인다. 조선조 최초의 백성장을 받은 서애 선생의 묘소는 쓸쓸하고 보기에 따라 초라할 지경이다. 지난 여름 야트막한 둔덕을 올라 찾은 묘소 주변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생전의 청백리 서애 선생을 닮았고, 스스로를 먼저 삼가는 징비록의 정신을 연상시킨다.
타인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것, 징비록을 읽는 모든 이들이 자칫 잊기 쉬운 징비록의 정신이다. 400여년이 지난 후손이 서애 선생을 만난다면 딱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한양성 기색은 여전히 그대로 입니까?"라는 물음이다.
    
▲ 안동시 풍산읍 수리 유성룡 묘 안동시 풍산읍 수리 서애 유성룡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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