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대학살..조조의 '독배'가 되다

2021. 1. 1.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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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용한 박사의 당신이 모르는 삼국지 (12)

영화나 드라마에서 조조군은 속전속결, 파죽지세로 묘사되고는 한다. 그 이미지는 바로 서주에서 탄생했다.

조조 주위 사방에는 적밖에 없었다. 조조는 직위만 연주자사일 뿐, 연주의 지배권이 약했기 때문에 전쟁을 오래 끌 수 없었다. 서주는 조조의 근거지 견성에서 정확히 동남쪽 45도 방향에 있다. 이 지역에는 여러 호수가 자리 잡고 있다. 기본적으로 동서를 나누는 장애물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호숫가 중간에는 나중에 유비의 거점이 되는 소패가 위치한다.

▶조조의 속전속결 전략

▷행정망 끊고 상대방 결집 막아

조조는 군을 둘로 나눴다. 주력은 자신이 이끌고 조인에게는 아마도 기병 중심이라고 생각되는 별동대를 줬다.

소설에서는 조조군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서주를 겁박하는 것처럼 묘사했지만 사실은 전술적 승리였다. 조인의 별동대는 성을 하나하나 공략하기보다는 휩쓸고 지나가면서 서주군 결집을 막은 것으로 보인다. 훗날 칭기즈칸 기병이 즐겨 쓰던 전술이다. 당하는 쪽 입장에서는 파괴의 흔적만 기억하므로 초토화 작전이라고만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약탈이 목적인 초토화 작전과는 달랐다. 군현을 빠르게 휘저으며 행정망을 끊고 서주군 결집을 막는 전략이다.

서주자사 도겸은 부장 ‘여유’를 파견해 조인군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조인에게 격파당했다. 그 사이 조조는 무인지경처럼 서주를 종단하면서 10여개 성을 가볍게 공략했다.

조조와 조인은 팽성에서 합류해 도겸의 주력군과 조우했다. 팽성은 과거 항우가 유방군을 대파했던 유서 깊은 지역이다. 양군이 서주 한복판인 팽성에서 만났다는 사실만 봐도 조조의 기동전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를 말해준다.

팽성 전투에서 패배한 후 도겸은 서주 북동쪽 끝인 담현으로 도주했다. 조조는 도겸을 추격해 부양에서 다시 승리하고 담현에 도달했다. 하지만 담현성을 함락하지는 못했다.

여기서 끝장 승부를 내면 서주는 조조 손에 들어온다. 하지만 공성전은 오래 걸리는 법. 조조에게는 시간, 여력, 군량 모두가 부족했다.

도겸 역시 항복할 마음이 없었다. 서주는 인력과 물자가 풍부해 조조가 물러가면 도겸은 바로 군사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단기전밖에 펼칠 수 없었던 조조는 잔혹한 결심을 한다. 서주가 재기할 여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솔직히 자신에게 귀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청주병(바로 그전까지 황건적)에 대한 배려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과거 약탈은 군사의 사기 진작을 위한 도구로 사용됐다.

철군하면서 조조는 조직적으로 취려, 저릉, 하구 등 서주 5개현을 짓밟았다. 이곳은 서주의 남동쪽에 위치했다. 팽성-부양-담현으로 이어지는 조조군 진격로에서 벗어나 있던 곳이다.

후한서 ‘도겸전’에서는 이때 참상을 삼국지보다 자세하게 묘사했다. 조조군은 현을 함락해 주민을 모두 도륙했다. 죽은 자가 수십만이었으며, 마을 내 닭이나 개도 남기지 않았다. 시체로 강이 막혀 물이 흐르지 않았고, 이 다섯 현에는 사람이 사는 자취가 없어졌다고 했다.

중국 기록에서 숫자는 10배는커녕 100배로 부풀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수십만이라는 숫자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수천이든 수십만이든 학살은 학살이다. 원래 이런 초토화 작전이 벌어지면 당장 군인에게 당하는 피해보다 그 후 식량 결핍, 병과 추위, 치안 부재 상태에서의 2차적인 폭력에 의한 피해가 더 크다. 당연히 조조도 그것을 알았고 그 효과를 예상했을 것이다.

▶조조는 왜 학살을 저질렀을까

▷서주의 재기를 막기 위해서였다지만…

여기서 드는 의문점이 있다.

조조는 마적단의 두목도 아니고 흔해 빠진 지방 군벌도 아니다. 그는 천하를 쥐고자 했던 인물이다. 아무리 상황이 급하다 해도 자신에게 부메랑이 돼 돌아올 역풍과 후유증을 생각지 못했을까.

어쩌면 꿈이 천하였기에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조조가 연주와 서주의 지배자로만 만족했다면 서주 통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런 방법을 구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하가 목표라면 서주는 전체의 일부가 된다. 여기저기서 여러 번 반복적으로 활용해서는 안 되겠지만 중국 전체로 보면 서주는 일부에 불과하다.

꿈이 그렇다 해도 당시 조조의 세력권으로 보면 서주는 절반이거나 그 이상이다. 당장 조조가 원소를 포함한 주변 강적과 겨루기 위해서는 서주 주민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모든 이점을 포기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아니 그렇다면 굳이 서주 정복전을 시도할 필요조차 없지 않을까. 과연 청주병을 먹일 군량과 군비를 마련하기 위한 약탈 전쟁인 것일까.

불친절한 동양의 역사 기록은 육하원칙에 의거해 자세히 상황 설명을 하지 않는다. 전체 배경이나 과정을 생략하면서 내용을 전개하거나 ‘알아서 해석하라’는 식으로 1~2가지 단서만 두서없이 툭툭 던져놓는다. 덕분에 역사가 입장에서는 추리 소설을 읽는 듯 재미가 있지만 그만큼 정황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조조가 그 같은 결단을 내린 이유를 자세히 살펴보자.

두 개의 단서가 있다.

동탁의 난으로 수도 주민들이 대거 동쪽으로 피난했다. 그 수가 거의 100만명이며 상당수가 부호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기록만 보면 이들 재산을 노린 약탈이 목적일 수 있다. 혹은 조조가 “원주민과 달리 이주민은 조조의 강압 정책에 굴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런데 천하의 조조도 예상치 못한 일이 터진다. 후한서에서 서주의 참상을 묘사한 다음에 이런 서술이 있다.

“삼보라는 지역은 이각의 난을 피해 서주로 이주한 주민이 모여 살던 곳이다. 이곳 역시 (조조군에게) 피해를 입었다.”

바로 두 번째 단서다. 후한서 편찬자가 굳이 이런 내용을 왜 넣었을까. 앞뒤로 아무 설명이 없다. 조조가 계획했던 구상, 즉 이주민을 힘으로 굴복시키려는 전략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음을 지적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학살과 약탈은 한번 시작하면 통제가 되지 않는다. 뤄양에서 온 이주민이라고 해서 언어나 피부색이 다르지는 않다. 사투리는 달랐겠지만 경쟁적으로 약탈을 벌이는 군대가 마을 주민 신원을 확인할 리도 없다. 조조가 피난민을 건드리지 말라고 강한 명령을 내렸고 실제로 마을 장로가 마을 입구에서 군대를 막고 우리는 서주 주민이 아니라고 소리쳐 마을을 보호한 사례가 있었다 해도 100% 지켜질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이런 사례 때문에 조조가 ‘부친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서주 주민을 다 죽여라’라고 했다는 소문이 생겨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칼에는 눈이 없다. 약탈은 눈과 이성을 마비시킨다. 조조가 이를 몰랐을 리 없다.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현재 남아 있는 기록만으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194년 조조는 다시 서주 공격에 나섰다. 전술은 이전과 똑같았다. 달라진 부분은 공략 지점이 서주의 북쪽, 서주와 산둥의 경계 지역이라는 사실뿐이다. 이전에 화를 입지 않은 유일한 영역이다. 그런데 서주에서 벌인 학살극 후유증이 생각보다 컸다. 천하의 조조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지점에서 둑이 터졌다. 그것이 조조를 일생일대 위기로 몰아간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90호 (2020.12.30~2021.01.0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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