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희망의 사람들] 쾅, 쾅, 砲소리가 일상.. 분단의 최전선에도 삶은 이어진다
‘충성!’
20여년 전 일이다. 유기환(67)씨가 아내와 함께 포병부대 사격훈련장에 떨어진 고철용 탄피를 주워오는 날이면 코흘리개 삼형제는 쪼르르 달려와 거수경례를 했다. 주위에 군부대가 널려 있고 탱크가 소방차보다 더 자주 다니는 마을에서 자란 삼형제는 군인 흉내를 냈다. 놀 때도 전쟁놀이를 했다.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고문리의 겨울 풍경은 평화로워보였다. 낮은 산들 사이로 논밭이 안온하게 펼쳐졌다. 도로 주변으론 얼어붙은 한탄강이 굽이굽이 이어졌다. 한탄강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질공원이다. 지난해 7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됐다. 까마득한 옛날에 용암이 분출하며 만들어진 현무암 주상절리는 이 동네에만 좌상바위, 아우라지베개용암, 재인폭포 등 3대 절경을 선물로 안겼다. 누군가는 연천을 ‘한국의 바르비종’에 비유했다. 밀레가 그 유명한 ‘만종’을 그렸던 프랑스 파리 외곽 시골 동네 말이다.
거수경례를 했던 삼형제의 맏이 흥용(37)씨는 자라서 아버지를 따라 한탄강에서 고기 잡는 어부가 됐다. 세상은 이들을 ‘재인폭포 부자(父子) 어부’라 부른다. 낭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이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포 소리다.
“쾅 쾅! 꽝 꽝!”
재인폭포마저 얼어붙었던 지난 연말의 어느 날, 그곳을 찾았을 때도 포 소리가 들렸다. 예기치 않은 굉음에 재인폭포에 나들이 나온 가족들이 깜짝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꽝 하는 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줄 알았다”고 했더니 유기환씨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 처음 듣는 사람들은 무슨 전쟁이 난 줄 알지요. 우리야 뭐 늘 듣는 소리니. 그래도 옛날보다는 많이 좋아졌어요.”
그는 좌상바위에서 재인폭포에 이르기까지 7㎞에 걸친 하천의 어업권을 갖고 있다. 농사 짓기도 하니 어부 겸 농부인 셈이다. 햇빛에 반짝이는 강물에 그물을 쳐 쏘가리, 메기, 빠가사리, 뱀장어, 모래무지, 참게 등을 잡는다. 부자가 잡은 민물고기는 아내 원종분(57)씨가 운영하는 식당 ‘불탄소가든’의 매운탕 재료가 된다. ‘불탄소(不灘沼)’는 한탄강이 굽이치는 곳에 위치한 깊은 웅덩이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다. 경치 좋은 그 불탄소가 내려다보이는 한탄강 변에 자리 잡은 이 식당은 이들이 접경지역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 결과물이다.
주상절리의 절경과 천둥 같은 대포소리가 아주 낯선 조합을 이루는 이곳은 ‘접경지역’이라 불린다. 비무장지대에 면해 분단의 현실을 가장 직접적으로 느끼는 곳이다. 연천에는 군부대가 76개나 된다. 재인폭포가 있는 고문리의 경우 사격장 때문에 고도 제한이 있어 인근엔 3층 이상의 건물이 없다. 그 유명한 다락대사격장도 근처에 있다. ‘한국의 바르비종’은 그렇게 군사 제약이 빚어낸 역설적 풍경이었다. 훈련 중인 탱크가 지나가면 흙벽돌집 벽돌이 금가서 무너져 내렸고, 포 사격 파편이 민가에 떨어져 민간인이 수없이 죽어 나갔다. 바르비종 같은 평화로운 풍경의 이면엔 분단의 파편이 박혀 있다.
그런데 이곳의 일상이 된 굉음의 포 사격은 주민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했다. 국가안보를 이유로 각종 규제에 묶여 지역 개발과 재산권 행사에 제한을 받아 왔던 이곳에선 할 게 별로 없었다.
“수복지역이라 농사지을 땅도 별로 없었어요. 탄피를 주워 배낭 하나를 채우면 그걸 팔아 쌀 1가마를 살 수 있었지요.”
포 사격 훈련이 있는 날이면 어른들은 사격장으로 고철용 탄피를 주우러 갔다. 월남한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던 아버지 유기환씨는 10대 청소년 시절부터 그 대열에 끼었다. 늦게 가면 건질 게 없을까봐 대포를 쏘는 중에도 겁 없이 내달렸다. 어른이 돼 결혼해서도 탄피 줍기는 계속됐다. ‘논농사 밭농사 지어도 똥값’이던 그 시절, 탄피 수거는 마을 사람들의 주요한 수입원이었기 때문이다. 1990대 초반, 불발탄을 만지다 하마터면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뒤 지긋지긋한 탄피 줍기를 그만두게 됐다.
부모 사정 모르고 아이들은 쑥쑥 커갔다. 뭐라도 해야 했다. 아는 형님 주선으로 백화점 납품용 센베이 과자(전병 과자) 포장 공장을 짓겠다고 소 3마리를 팔아 땅을 샀다. 모자라는 돈은 대출 받았다. 그 백화점이 부도가 났다. 그해 연말 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직전의 일이었다. 결국 그 자리에 공장 대신 식당을 지었다. 아내가 끓여서 파는 매운탕 재료를 대기 위해 어부가 됐다. 수년 전 뇌경색이 온 이후로 아들 흥용씨도 아버지를 도와 어부가 됐다.
남편과 아들은 고기 잡고 아내는 매운탕을 끓여 파는 연천의 유기환씨네에게 중요한 장사 밑천은 남북 평화다. 남북 관계가 한번 어그러지면 손님이 뚝 끊긴다.
박근혜정부 때인 2014년이 그랬다. 북한은 탈북자단체가 날린 대북전단 풍선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북한에서 쏜 포탄이 연천의 민가까지 날아왔다. 식당엔 손님이 하나도 오지 않았다.
“북한에서 방귀만 뀌어도 이곳은 불안해요. 손님도 안 옵니다. 또 불안한 곳에 누가 투자를 하겠어요. 아무렴요. 남북 관계는 좋아져야하지요.”
꽁꽁 언 한탄강을 내려다보며 유기환씨가 말했다. 봄이 와서 저 얼음이 녹을 때쯤 남북 관계에 다시 훈풍이 불기를 바라는 듯, 목소리엔 간절함이 느껴졌다.
연천=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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